여행 일반
‘들꽃 천국’ 대덕산
라이프| 2013-07-11 11:18
지난 겨울 설국세상 간데없고
이름 모를 700여종 야생화 만개

금대봉 꽃밭엔 나비·잠자리떼 반기고
분주령 길목엔 200년 넘은 피나무가

남자한테 좋다는 짚신나물 하나에
힘들다던 일행들 선채로 맛보기 바빠

1300여m 대덕산 정상엔 범꼬리풀 너울
지친 하산길에 만난 야생 오디 맛에 흠뻑
풀섶 붉은 산딸기 유혹에 시간도 잊어…


또 ‘그분’이다. 폭설 직후 처음 만났던 태백. 그해 겨울, 무릎까지 눈이 차오르던 설산을 안내했던 김상구 문화관광해설사다. 2시간이면 끝날 산행 일정을 “쪼매만 가면 됩니다(조금만 가면 된다)”라는 ‘산(?)거짓말’로 4시간30분짜리로 만든 장본인이다. “아, 그때 그 아가씨구먼…. 잘 지냈어요?” 하며 멋쩍은 인사를 건넨다. 기껏해야 해발 1300m. 히말라야도 아닌 백두대간 대덕산에서 겪었던 ‘조난 체험’이 떠오른다. 힘든 일일수록 지나고 나면 ‘추억’이라더니, 왠지 모를 반가움도 밀려온다. 하지만 다 같은 마음은 아니었다. 당시 하산 중에 부상을 입었던 한 일행은 김 해설사의 등장에 입이 ‘삐죽’ 나온다. <헤럴드경제 2012년 1월 26일자 28면 기사 참조>

김 해설사를 여름에 다시 만난 건 지난겨울과 똑같은 코스로 대덕산을 또 오르기 위해서다. 지난해 설국 속 눈꽃을 감상했지만 이번엔 700여종에 이르는 여름 야생화 천국으로 들어간다. 대덕산 정상은 범꼬리풀 군락이 장관이라고 한다. 다만 제멋대로인 태백 날씨가 변수다. 어떤 해엔 7월 초, 어떤 해엔 7월 말에 만개한다. 무작정 오른다고 매번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꽃마다 피는 시기가 차이가 나서 운이 좋아야 군락을 만난다. 김 해설사는 “글쎄, 어제 비바람이 불어서… 꽃이 많을까 모르겠네”라며 걱정했다. 

노란 기린초 위에 살포시 나비가 앉았다. 겨울철 눈꽃 산행만큼이나 대덕산은 봄ㆍ여름 야생화 트레킹도 인기다. 특히 7월, 대덕산 정상은 범꼬리풀ㆍ일월비비추 등 700여종에 이르는 야생화 천국이 된다. 만개하는 시기는 들쑥날쑥이라서, 매일 산에 오르는 문화관광해설사 등 ‘정보원’에게 자주 문의하는 게 좋다. 두문동재에서 금대봉, 분주령을 거쳐 대덕산 정상을 찍고 다시 검룡소까지 내려오는 길은 가파르지도 않고 쉬엄쉬엄 걸어도 4시간이면 충분하다. 남녀노소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트레킹 코스. 꽃밭 위를 배회하는 나비와 잠자리 떼가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덤벼드는 것도 신선하다. 아이들에겐 건강한 바람을 맞으며 꽃 이름도 공부하는 유용한 자연학습시간이 된다. 사진은 소니의 DSLT(디지털일안투과식) 카메라 A77로 찍은 대덕산 기린초의 모습.


# 두문동재(1268m)~헬기장~금대봉(1418m)… 잠자리ㆍ나비 떼의 공격=겨울엔 두문동재까지 차로 오르기도 쉽지 않았다. 눈은 펑펑 내리고, 차는 엉금엉금 기다가 멈췄다. 그래서 ‘험난했다’고 기억되지만 사실, 대덕산 등정은 비교적 ‘쉬운 등반’에 속하는 편이다. 두문동재까지 차로 올라, 헬기장을 거쳐 금대봉까지 금세다. 오르막길도 거의 없다. 그저 청량한 기운과 푸른 숲을 즐기면 된다. 가는 길목마다 꽃들이 반긴다. 요광나물ㆍ큰까치수염ㆍ산꿩의다리ㆍ털이풀ㆍ노루오줌ㆍ물레나물ㆍ짚신나물ㆍ꿀풀ㆍ엉겅퀴…. 재밌기도 하고 어려운 이름들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 이래서 이렇게 지었군’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헬기장 주변과 금대봉엔 꽃밭이 펼쳐진다. 꽃밭 인근에 다다르니 나비와 잠자리 떼가 공격한다. 사람이 온 걸 모르는지, 사람이 무섭지 않은지, 아니면 뭐가 뭔지 모르는 건지 나비는 미동도 없이 꽃 위에 고상하게 앉았다. 잠자리 서너 마리가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이런 ‘사랑스러운’ 공격이라면 얼마든지 받아주겠어. 이 산의 곤충들은 어딘지, 저 ‘아래 것’들과는 다른 듯 보인다.

김 해설사는 삼척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아, 멸종 2종인 큰바늘꽃 보러 갔었죠. 누가 발견했다고 연락이 와서. 이거 보세요.” 사진 속 꽃이 곱다. 김 해설사는 꽃 한 송이를 보려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다. 그 열정에 탄복하려는 찰나 “어, 대덕산 정상에 하늘나리가 있다네요. 오늘 정상까지 오를 거죠?” 하고 묻는다. ‘하늘나리’라면 서울 도심에서도 종종 보이는데 뭣 하러 거기까지 가냐며 ‘꼼수’를 부려본다. “사람 손 안 닿는 데에 있는 꽃들은 훨씬 더 예쁘지요” 하는데, 마음이 이미 정상으로 달려가고 있다. 등정 결심엔 태백의 선선한 날씨도 한몫했다. 이날 삼척은 37도까지 올랐지만 태백은 27도였다.



# 고목나무샘~벌밭등~분주령(1080m)… 고고한 일월비비추ㆍ신령스러운 피나무=고목나무샘부터 분주령까지 가는 길이 고비다. 비가 온 다음날이라 그런지 길도 보통 미끄러운 게 아니다. 분주령은 삼척과 정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던 옛길에 붙여진 이름이다. 낙엽송 군락이 시원하게 펼쳐지지만 발걸음은 무겁다. 금대봉에서 고목나무샘까지는 1.1㎞에 불과했으나 여기서부터 등산객 ‘쉼터’인 벌밭등을 지나 분주령까지는 2.5㎞ 길이 이어진다. 오르락내리락도 이전보다 많아져 3~4배쯤 먼 거리처럼 느껴진다. “여기 와 보세요, 재밌는 풀이 있네요” 하는 해설사의 말에도 시큰둥해진다.

벌밭등에서 한숨을 돌린다. 대덕산에 오르는 등산객들이 한 차례 쉬어가는 너른 마당이다. 간혹 비박을 하는 캠핑 마니아도 있지만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엄연히 불법이다. 신령스럽게 굵은 가지를 뻗은 고목이 이곳의 주인이다. 이 피나무는 최소 200년으로 추정된다. 보통 고급 바둑판을 만들 때 쓰이는데, 오래 써서 홈이 패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상복귀되는 성질이 있다. 김 해설사가 벌밭등 가장자리에서 풀을 하나 뜯는다. 짚신나물이다. ‘남자’한테 좋단다. 올라오는 내내 “힘들어 죽겠다”던 사람들이 선 채로 질겅질겅 풀을 씹는다.

분주령 가는 길엔 하얀 꽃망울의 일월비비추를 만났다. 며칠 전에 한 차례 만개했다고 한다. 이날 꽃들은 아직 입을 다물고 있다. 7월 20일쯤이면 활짝 핀다. 일월비비추는 경북 일월산에 많이 피는 꽃으로, 본래 연보랏빛을 띠지만 태백에선 흰색만 핀다. 만개한 모습은 백합을 닮았다. 고고한 꽃일수록 흰색인가.

삼척과 정선으로 가는 사람들을 나누던 분주령은 이번 트레킹 일행을 둘로 나눴다. 지친 이들은 삼척 방향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검룡소 주차장으로 곧바로 내려갔다. 입을 다문 일월비비추가 아쉬웠던 나머지는 대덕산 정상을 향해 직진했다.

지난 겨울 설산에 이어 이번 산행 안내도 맡은 김상구(맨 왼쪽) 문화관광해설사. 힘겨워하는 일행을 위해 그는 대덕산 벌밭등 가장자리에서 ‘남자’한테 좋다는 짚신나물을 뜯어 일행에게 나눠줬다.


# 대덕산(1307m) 정상엔 범꼬리풀이 바람에 춤추고=대덕산 정상 봉우리 직전엔 푸른 ‘쑥대밭’이다. 엉망진창 어질러진 모습이 아니라 어른 허리 높이까지 자란 진짜 ‘쑥’이다. 일월비비추 군락도 아쉽고, 범꼬리풀 군락도 아직인데 ‘쑥대밭’을 만나다니…. 

정상엔 바람이 거세다. 이 정도면 여름에 부는 뜨거운 바람이 아니다. 땀이 식어 추운데 때아닌 바람의 습격에 몸이 더 움츠러든다. 주변의 나무도 겨우겨우 버티는 모습이다. 동에서 서로 부는 바람 탓에 나무도, 풀도 모두 ‘서쪽바라기’다. 범꼬리풀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보통 이맘때면 대덕산 정상은 ‘범의 꼬리’가 가득해야 하는데,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군데군데 소군락을 이루고 있었지만 아직 덜 핀 것도 있고 비바람에 꽤 진 것도 같았다. 이날 어마어마한 야생화 군락을 만나는 행운은 없었다. 올해 대덕산 야생화는 아마도 20~25일 사이가 가장 아름다울 것으로 보인다. 30년 넘게 산을 탄 태백 토박이의 ‘감’이다. 그렇다면 아직 몇 번의 기회가 남았다. 

대덕산 야생화 트레킹 코스는 5월 16일부터 10월 31일까지 출입이 가능하다. 최소 나흘 전에 생태 탐방 신청을 해야 한다. 탐방 가능 인원을 하루 300명으로 제한하고 있으니, 떠나기 전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 태백시청 관광 홈페이지(http://tour.taebaek.go.krㆍ태백시청 환경보호과(033-550-2061)에서 가능하다.  

분주령 가는 길에 만난 일월비비추(위쪽부터)는 태백에서는 흰색만 핀다. 산행 내내 길동무가 돼준 기린초와 요광나물, 노루오줌.


# 하산길엔 오디가 후드득… ‘뽕 따느라’ 세월을 잊었네=눈길, 얼음판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거친 바람이 부는 정상에서 한참을 보내고 나니 피로감도 만만치 않다. 검룡소 주차장까지 평탄한 길을 걷는 것도 지친다. 내리막길보다 몸은 편하지만 더디고 지루한 시간이 계속된다. 개망초는 지천이다. 기린초ㆍ노루오줌ㆍ일월비비추ㆍ하늘나리ㆍ터리풀ㆍ짚신나물이 내려오는 길에도 반긴다. ‘음, 자동 복습이네’ 하며 애써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타박타박 발을 내딛는데, 땅바닥에 까만 열매가 눈에 띈다. “어, 오디다!” 일행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고개를 든다. 머리 위엔 산뽕나무. 사람들이 모여든다. 흐드러진 나뭇가지를 하나씩 잡고 열매를 따서 먹는다. “이게, 바로 ‘뽕 딴다’는 거야?” 하며 한바탕 웃는다.

달다. 신선하다. 먹다 보니 손도, 입도 새까매진다. 잠깐 머문 듯했는데 어느새 해가 졌는지 주변이 어둑어둑하다. 뭐에 홀린 건 아닐까. ‘정신없이 오디를 먹다 보면 산 아래 세상은 한 3년쯤 지나는 거 아닐까?’ 하는 허무맹랑한 생각마저 든다. 일행은 대부분 사라지고 없다. 발길을 재촉한다. 하지만 또 산뽕나무가 나오면 열매에 손이 가는 걸 어쩌랴. 산뽕은 기생하는 곤충까지 먹어도 될 정도로 몸에 좋다고 하니까. 그뿐이랴, 풀 섶에는 빨간 산딸기가 유혹한다. “이런 건 지나치는 게 무례한 거야”라고 한 누군가의 말이 떠올라 산딸기도 한 움큼 입에 넣는다.

검룡소 주차장엔 지친 표정의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뭐 하다 인제 왔느냐?”며 타박인데,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고민이 된다. “뽕 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태백=글ㆍ사진 박동미 기자/pd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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