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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크엔드] “한국으로 돌아가라”…한인타운서 확성기 틀며 섬뜩한 반한시위
뉴스종합| 2013-08-16 11:16
日정권 암묵적 주도하에 시위 이뤄져
대다수 일본인은 우경화 의도에 침묵
한국대사관 중지 요청에 최근엔 잠잠



[도쿄=신창훈 기자] 일본 도쿄의 중심부 신주쿠에 위치한 도쿄한국학교. 이 학교는 최근 학부모들에게 한 가지 주의를 당부하는 가정통신문을 발송했다. “학생들이 통학 중 전철 안에서 우리말로 떠들거나 한글로 된 책을 읽지 않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한국인을 극도로 싫어하는 일본인이 보고 테러를 저지를 위험이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두 아이가 도쿄한국학교에 다니는 기자는 이런 내용의 ‘경고문’을 받고 어떻게 판단해야 좋을지 한동안 난감했다. ‘아이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게 맞나. 가뜩이나 일본어가 서투른 아이들을 더욱 주눅 들게 하진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졌다.

도쿄한국학교 학생의 반 이상은 일본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주재원 자녀들이다. 아무래도 일본어가 서툴러 친구들끼리 있으면 우리말을 더 많이 쓴다. 그래서 학교 측의 걱정이 충분히 이해가 됐다.

기자가 일본에 온 지 10개월 정도 됐지만 다행히도 아직 한국 국적의 학생이 전철 같은 공공장소에서 일본인에게 해코지를 당했다는 뉴스를 접한 적은 없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한국 아이들에게 이런 식의 ‘주의’를 줘야 하는 현실이다.

2차 세계대전의 침략전쟁 원흉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A급 전범까지 등록해 이들을 추모하고 있는 일본 도쿄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입구. 일본 국수주의와 우경화의 상징으로, 매년 7월 전쟁 희생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미타마축제(미타마마쓰리)에 맞춰 걸어놓은 엄청난 규모의 노란 등이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왼쪽). 야스쿠니신사의 부속시설로, 전쟁 희생자 추모관이자 정신교육장 역할을 하는 유슈칸(遊就館)은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를 미화하고 이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영웅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당시의 군가를 CD에 담아 어린이 및 성인용으로 판매하고 있다(오른쪽).

▶섬뜩한 ‘반한 데모’… 최근 잠잠해져=도쿄한국학교 측이 학부모들에게 ‘경고문’을 발송하게 된 것은 일본 극우단체들의 ‘반한(反韓) 데모’ 때문이다. 올 들어 지난 6월까지 도쿄의 한인타운인 신오쿠보에는 일본 극우단체가 트럭에 확성기를 달고 돌아다니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신오쿠보는 도쿄한국학교에서 걸어서 15분이면 도달하는 곳이다.

이들이 소리치는 내용은 “한국인은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고막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터져나오는 확성기 음성을 듣고 있으면 정말 섬뜩하다. 무엇보다 씁쓸한 건 한국인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윽박지르는 나라는 일본 이외에 전 세계 어느 문명국가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반한 데모로 인해 신오쿠보 한인 상인들의 피해는 엄청나다. 예전 같으면 평일에도 한국 문화를 접하려는 일본인들로 붐비던 거리는 최근 매우 한산해졌다. 상인들의 매출도 절반 이상 줄어들었다고 한다.

한국대사관과 영사관을 포함해 세계 각국의 대사관이 몰려 있고 고급 맨션이 많아 도쿄 시민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곳인 미나토구(港區) 아자부주반(麻布十番) 주변에도 주말만 되면 극우단체의 반한 데모차량이 출몰한다. 이들은 시끄러운 확성기에 대고 헌법 개정, 독도 영유권 주장과 함께 한국인에 대한 모욕적인 언행을 서슴없이 일삼는다.

그런데 지난 7월부터 분위기가 약간 바뀌었다. 극우단체들의 ‘반한 데모’차량이 안 보이기 시작했다. 들리는 얘기로는 이병기 신임 주일한국대사가 일본 외무성 고위 관료에게 극우단체들의 데모 중지를 비공식적으로 요청한 이후 잠잠해졌다고 한다. 한인들로는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뒤집어놓고 생각해보면 이는 반한 데모를 주도하고 있는 극우단체의 실상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부 당국자가 중지를 요청한다고 그만두는 데모라면 극우단체 뒤에 현 정권의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거나 암묵적 동의가 있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 어찌 보면 ‘데모 같지도 않은 데모’일 수 있다는 얘기다. 기자의 일본인 지인은 “몇몇 극우단체의 반한 데모에 손뼉을 치는 일본인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이들은 일본 사회에서 한 줌도 안 되는 ‘찌질한 사람들’”이라고 비난했다.

▶대다수 일본인은 침묵=도쿄 도심을 시끄럽게 하고 있는 극우단체의 반한 데모는 일본 우경화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지난해 말 치러진 중의원 선거와 올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한 자민당 아베 정권은 이른바 ‘평화헌법’의 개정을 공식화하며 우경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양대 선거에서 자민당의 슬로건은 ‘일본을 되돌려놓는다(日本 をとりもど•す)’였다. 이 말 속에는 많은 것이 포함돼 있다. 우선 ‘현행 헌법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연합국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에 소위 정상 국가의 헌법으로 되돌려놓겠다’는 주장과 의도가 들어 있다. 또 하나는 장기 불황에 빠지기 전, 세계를 호령했던 일본 경제를 되찾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국제사회의 비난 따윈 신경 쓰지 않는 강한 ‘정신 무장’이 필요하다는 게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를 위시한 우익 세력의 생각인 듯하다. 아베정권 각료들이 8월 15일에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겠다고 나서는 것도 그런 연유로 해석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 극우 세력의 주 타깃이 된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최근 기자는 일본의 한 시민단체가 주최한 ‘행복국가 연구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강연자로 나선 한 일본인이 갑자기 모임의 주제와 전혀 상관없는 발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시아 각국 사람들은 일본인에게 매우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특히 과거 식민지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은 ‘이 정도까지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건 일본 때문’이라며 칭송이 자자하다”고 말했다. 이를 듣고 있던 거의 모든 참석자의 얼굴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강연자의 머릿속에는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얼룩진 피식민지배 국민의 고통스러운 역사는 없었다.

한 일본인은 “이런 사람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크게 들리는 것은 다수의 일본인이 침묵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침묵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라며 “다수가 입을 다물고 있는 한 ‘일본의 우경화’는 더욱 시끄럽게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chunsim@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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