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기사
주체사상 흡수이후 운동권 주류 장악…진보정당 접수뒤 야권연대로 원내진출
뉴스종합| 2013-09-02 11:17
“조선민족이라는 자주적 관점에 서서 남쪽의 혁명을 책임진다는 자주적ㆍ주체적 입장에서 현 정세를 바라보면 옳다.”

국정원이 내란음모 혐의로 수사 중인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지난 5월 마포구 합정동의 한 종교시설에서 한 발언에는 NL(민족해방) 계열의 시대착오적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이원이 이날 100분가량 이어진 강연 내내 쏟아낸 ‘자주’ ‘주체’ ‘미 제국주의’는 NL의 정신적 주춧돌인 셈이다.

재야 운동권의 대표주자로 활동하던 때도, 2000년 진보정당과의 연대를 통해 기성 정치권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도, 그리고 지난해 4ㆍ19 총선과 5ㆍ2 당내 쿠데타를 통해 원내진출에 성공한 지금도 NL의 시대착오적 생각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NL은 1986년 개헌정국 당시 북한의 주체사상을 사상적 기반으로 반독재 민주변혁운동 과정에서 생성됐다. 주체사상의 대부라는 평가를 받다가 북한인권운동가로 변신한 김영환 씨가 ‘강철서신’을 제작ㆍ배포하며 주체사상을 남한에 본격적으로 이식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당시 NL 계열의 첫 체계적 조직이라 할 수 있는 구국학생연맹은 대중투쟁기구인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적 투쟁위원회(자민투)’를 결성하고 대중운동을 전개하면서 지하에서 지상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NL은 이후 1980년대 중ㆍ후반 시대를 풍미했던 사회구성체 이행 논쟁 과정에서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내세워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을 제시한 제헌의회(CA) 계열에 맞서 이론을 가다듬고 조직을 확대하는 등 몸집을 불려나갔다.

NL과 CA 구도는 직선제 개헌과 그 결과로 노태우정권이 탄생하면서 NL과 민중민주(PD) 계열의 구도로 재편돼 이어졌다. NL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대학 학생회를 대부분 장악하면서 PD의 도전을 물리치고 운동권 내에서 주류의 위치를 점할 수 있었다. 진보개혁진영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PD가 내세우는 주장이 다소 복잡하고 어려웠던 반면 NL의 논리는 상대적으로 단순명쾌했다”며 “미국의 정치개입과 주한미군 범죄 등이 맞물리면서 젊은 대학생이 감상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측면도 있었다”고 말했다.

1990년대 중ㆍ후반 학생운동이 급격히 몰락하자 NL 진영은 진보정당을 통한 활로 모색에 들어갔다. NL은 당초 시기상조론과 무용론을 들어 독자적인 진보정당운동보다는 야권과의 비판적 연대를 선호했다. 하지만 국회 원내진출이라는 목표 아래 전술을 수정, 2000년 민주노동당에 적극 가세하기 시작했다. 이 의원이 주도한 ‘경기동부연합’의 중앙조직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도 2002년 민노당에 공식 참여했고, 급기야 지난해엔 국회 원내진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국회 원내진출이라는 목표가 달성되자 수면 아래 잠재돼 있던 NL과 PD의 갈등과 앙금이 표면화하기 시작했고, 이는 지난해 운동권의 패거리 문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당내 비례대표 경선 부정과 애국가 부정 등 종북 논란으로 분출됐다.

이 이원이 이날 강연에서 “종파분자의 당권 찬탈 모의로 통일세력을 도려내서, 자기 혁명세력으로 표현되는 가장 위대한 진보세력의 정통성을 무너뜨리고, 일부의 개량주의 세력으로 표현되는 무형분자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아서 체제를 강화하고…”라고 말한 것은 NL과 PD의 뿌리깊은 앙금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결국 한때 운동권 주류였던 NL 계열은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종북 논란의 상처를 채 씻어내기도 전에 내란음모 혐의에 연루됨으로써 종말 위기에까지 처하게 된 셈이다. 

신대원 기자/shindw@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