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명작에 가리어…기억에서 사라질 뻔한 숨은 진주들
라이프| 2014-01-21 11:03
평론가 정준모씨 근대미술 분석서 출간
한국미술사 수놓은 91명작품 108점 수록
일품주의에 쏠린 한국미술계에 ‘쓴소리’

“그림은 시대의 거울이자 역사의 증인
역사속 묻혀버린 작품찾아 전국 누볐다”


“한국 미술계는 유명작가만 좇는 일품주의가 문제입니다.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물론 중요한 작가죠. 하지만 모두들 스타플레이어만 파고든다면 우리 미술계는 너무 빈약하지 않을까요? 보다 다양한 작가들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여야 미술계 결이 풍부해집니다. 한정된 ‘아이템’을 넓힐 때 미술시장에도 온기가 돌 겁니다.”

10년간의 작업 끝에 본격적인 근대미술 분석서인 ‘한국 근대미술을 빛낸 그림들’(컬처북스)이란 책을 펴낸 미술평론가 정준모(57) 씨는 우리 미술계의 ‘쏠림현상’부터 지적했다. 특히 근대미술의 경우 유명작가 작품에 치중해 연구 및 감상, 전시가 이뤄지다 보니 파란만장했던 격동기의 주요 작품들이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 꼼꼼하게 살펴볼 작가와 작품이 적지 않음에도 몇몇 특정작가에만 올인(?)해 우리 스스로의 잠재력과 파워를 낮추는 상황이라는 분석이다.

상념에 빠진 여인을 그린 고 박노수 화백의 국전(1955년) 대통령상 수상작‘ 선소운(仙蕭韻)’. 기존 동양화에선 찾아보기 힘든 새로운 윤곽선 처리와 참신한 인물 표현이 돋보인다. 187×15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정준모
정 씨는 “최근 들어 해외작가 작품에 대한 호응은 날로 커지는 데 반해 한국근대미술은 고리타분하다며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이들이 많아 아쉽다”며 “미술은 ‘시대의 거울’이자 ‘역사의 증인’인 만큼 우리의 뿌리인 근대미술에 좀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밝혔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을 역임하고, 미술정책 전문가 및 미술비평가로 활동 중인 저자는 이번 책을 통해 한국 전통미술과 서구 근대미술이 만나 새로운 변화의 흐름을 보여주기 시작한 1900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적 정체성이 어떻게 발현되고 조형화됐는지 해부했다. 지난 2002년 국립현대미술관에 재직하던 당시 한국근대미술 100점을 선정해 ‘한국근대회화 100선’이라는 기획전을 주관한 경험이 집필의 기반이 됐다.

책에는 대중에게도 친숙한 박수근 이중섭 천경자는 물론이고, 김경 김규진 김용준 김주경 박상옥 변관식 안중식 이종우 정규 정종여 등 근대미술가 91명의 작품 108점이 수록됐다. 저자는 “소위 ‘명품’ 위주의 선정보다는 미술사적 ‘맥락’을 이루도록 했다”며 “미술계 쏠림현상 때문에 역사 속으로 묻혀버린 작가의 작품을 찾기 위해 전국을 누비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금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안상철(1927~93)의 수묵화 ‘전(田)’이다. 가을걷이가 끝난 황량한 들판을 장대하게 그린 이 작품은 1956년 제5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정 씨는 “수소문 끝에 개인소장자가 신문지에 돌돌 말아 두었던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했다. 김규진(1863~1933년)의 원숙한 역량이 유감없이 발휘된 가로 8.8m의 채색화 ‘총석정’은 구한말 조선황실의 위엄을 드러낸 수작이나 창덕궁 희정당에 벽화 형태로 걸려 있어 일반인은 접하기 힘든 작품이다. 

권옥연의 1948년 작‘ 고향’. 향토적 정서와 고갱풍 표현이 결합된 작품이다. 유화. 162×226cm. 산업은행 소장.
이영일의 1928년 작 ‘시골소녀’. 152×142cm. 이삭줍기에 나선 가난한 어린이들을 표현한 채색화다.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 밖에 한국 초기 추상의 대표작가인 이규상(1918~64)의 ‘작품A’, 화가이자 이론가, 수필가로 활동했던 김용준(1904~67)의 유화 및 수묵화, 장운상(1926~82)의 ‘첼로와 여인’, 지난해 타계한 한국화가 박노수(1927~2013년)의 인물화 ‘선소운’ 등 평소 만나기 어려운 작품들을 두루 수록했다. 또 원화의 색감을 잘 살린 도판과 작품해설, 작가의 프로필과 활동상을 꼼꼼하게 곁들여 보는 재미와 함께 읽는 재미도 전해준다. 부록으로 ‘한국미술의 근대와 근대성’이란 근대미술사 개론과 연표를 덧붙여 깊이를 더했다.

정 씨는 “상업 화랑들이 팔기 좋아 강조해온 명작들보다는, 작품의 진가가 조명될 기회가 없어서, 무대로 불러주지 않아 나서지 못했던 작가 및 작품에 좀 더 신경을 썼다”며 “여행의 큰 즐거움 중 하나가 못 본 걸 보고, 먹어보지 못한 걸 먹는 것이듯 아는 것만 보려는 감상방식을 넘어 한국근대미술의 다양성을 함께 즐겼으면 한다. 때론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앨범 B면에 있는 노래가 더 좋지 않던가? 그런 숨은 진주를 찾아내는 묘미를 주고 싶다”고 했다.

이어 “그림은 단순히 화가의 사유만이 아니라 그가 체험하고 살았던 시대의 이미지 총합이자 사회적 의사소통 체계의 산물이다. 일제강점기며 6ㆍ25 전쟁 당시 그려진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시대 아픔이 녹아들어 있다”며 “그림 속 숨은 의미를 찾아가며 우리의 근대사를 이해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yr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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