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
쿠키 굽는 천사들의 ‘代父’
뉴스종합| 2014-02-03 11:03
갓 구어낸 쿠키의 구수한 맛에 은은한 커피 향, 여기에 사랑의 온정이 그득한 아주 특별한 곳. 서울 강남구 일원1동 주민자치센터 맞은편, 4층 크기의 아담한 건물 지하에 자리 잡은 카페형 베이커리 래그랜느(LES GRAINES)가 바로 그곳이다.

“래그랜느는 불어로 씨앗(밀알)이란 뜻입니다. 한 톨의 씨앗이 뿌리를 내려 세상 밖으로 나와 하나의 온전한 성장체가 된다는 의미로 택한 이름이지요. 건물 이름도 즐거움이 샘솟는 곳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조이(JOY)로 지었고요.” 래그랜느 사장이자 건물주인 남기철(61) 씨의 설명이다.

그는 중국과 유럽에 전자부품을 수출하는 무역회사 씨트라의 대표이면서 자폐성 장애우들에게 꿈과 희망, 특히 재활과 자활의 길을 열어주기 위해 설립한 사단법인 밀알천사의 대표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1인다역이다. 


래그랜느는 2011년 6월에 남 대표가 운영하는 씨그램이 100% 출자해 설립한 자폐성 장애우들의 일터로, 강남구의 서울형 사회적 기업이다. 서른을 훌쩍 넘긴 남 대표의 아들 범선 씨를 포함해 여섯 명의 자폐성 장애우가 파티셰로 일하는 열댓 평의 작업장과 문 하나 사이에 또 그만한 쉼터가 있다. 자폐 특유의 그 순수함 그대로 배운 대로 정직하게 100% 손으로 빚어낸 다양한 모형의 쿠키는 곧바로 진열돼 전문 바리스타가 제공하는 커피 향과 어우러져 이곳을 찾는 손님들의 선택을 기다린다.

이런 일터를 만들게 된 남 대표의 사연이 애틋하다. 바로 ‘작업치료’다. “자폐성 장애를 가진 이들의 경우 작업치료는 또 하나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서른이 넘어도 인지능력은 서너 살이 고작인 자폐성 장애는 변화를 싫어하고 좁은 공간에서 집착하는 면이 강한 게 문제입니다. 다른 작업보다 밀가루 반죽을 통해 다양한 모형의 쿠키를 만들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변화를 체득하게 되고, 또 대인관계까지 깨우치게 됩니다. 무엇보다 밀착 돌봄을 해야 하는 장애우 부모들을 8시간 정도 해방시켜드리는 것도 큰 목적이자 보람이죠.”

한 건물 안에서 삶의 보람과 애환을 고스란히 품고 짊어진 남 대표, 마음고생만큼이나 애로사항의 무게가 만만찮다. “우리 사회의 심각한 경제적 양극화 현상이 복지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대기업이나 큰 기부는 자기 홍보를 위해 대형 복지 쪽으로 쏠리게 됩니다. 작은 복지시설이 소외당할 수밖에 없는 구조지요. 이래선 진정한 복지가 될 수 없습니다.” 

사단법인 밀알천사 남기철 대표가 운영하는 자폐장애우들의 일터인 카페 래그랜느에서 남 대표의 아들 범선 씨와 동료들이 정성껏 쿠키를 만들며 자활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남 대표가 애초에 원했던 것은 사회적 기업이 아닌 장애인기업. 그러나 규제 때문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자폐성 장애의 경우 거동에 별 문제가 없는데도 공장을 어디다 세울 거냐고 먼저 묻습니다. 지하라고 하면 단박에 거절당합니다. 장애의 특성을 세분하지 않고 무조건 모든 장애에 공통적으로 지하는 안 되고, 엘리베이터에 휠체어 두 개가 들어가야 하고, 맹인용 바닥재와 점자를 부착해야 하고, 완전개방형 장애자용 화장실을 구비해야 하는 조건이 붙습니다. 결국 짓지 말라는 것이죠. 기업이 장애인들을 위해 투자하려 해도 연간 이익금의 10% 이내만 손비처리가 돼 이익도 못 내는 데다 내더라도 규모가 작은 기업은 엄두도 못 냅니다. 인증자격 완화가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규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제도적인 모순이다. 고등학교까지는 보호를 받지만 정작 더 중요한 시기인 그 이후부터의 돌봄은 몽땅 다시 부모의 몫이 되고 만다는 것. 가장 큰 애로가 바로 취업과 결혼이지만 현실은 냉혹하기만 하다고 한다.

그에게 꿈이 있다면 무엇이냐 물어봤다. “2~3년 내다보고 더 많은 자폐성 장애우들이 일할 수 있는 기업을 몇 군데 더 세울 계획입니다. 제품 생산조립 공장을 세우고 농장을 만들어 자폐 장애인들이 사정에 맞게 순환하며 일하고, 궁극에는 부모 없이 자립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미 자비를 들여 부지를 확보해 놓았습니다.”

남 대표는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자폐성 장애아들을 두면서부터 종교를 택했고, 모든 신념과 인생관을 여기에 철저하게 맞춰 왔다는 게 주변의 설명이다. ‘그래서 사랑하고 그래도 사랑한다’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펴낸 뒤 이듬해 래그랜느를 설립했다는 남 대표는 인터뷰 내내 자폐성 장애인들을 ‘천사’로 불렀다.

황해창 선임기자/@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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