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오후(이하 현지시간),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한 2014 런던도서전이 열리고 있는 영국 런던 얼스코트 전시장. 전시장 한복판에 마련된 주빈국 전시관에 영국의 찰스 왕세자의 부인인 카밀라 콘월(66) 공작부인이 찾아와 ‘마당을 나온 암탉’의 저자 황선미 작가를 만났다. 전시 중인 ‘마당을 나온 암탉’ 영어판, 불어판, 폴란드어판 등을 살피던 콘월 공작부인은 “아동들이 책을 읽게 만드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며 작품의 영국 출판을 축하했다.
‘마당을 나온 암탉’ 영어판은 지난달 30일 영국의 대형서점 포일즈(Foyles) 런던 워털루 점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비록 영국의 서점 베스트셀러에서 한국 작가의 작품이 정상을 차지한 것은 최초다. 자국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영국에서 소수 언어권의 작품이 주목을 받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영국 최대 규모의 서점인 워터스톤스(Waterstones)는 이 책을 ‘3월의 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황 작가는 이번 도서전 사흘 간 동안 매일 1명씩 선정되는 ‘오늘의 작가’에도 이름을 올리며 다양한 문학행사에 참여했다
영국의 찰스 왕세자의 부인인 카밀라 콘월 공작부인(왼쪽)이 지난 9일 오후(이하 현지시간) 한국이 주빈국으로 참여한 2014 런던도서전이 열리고 있는 영국 런던 얼스코트 전시장에 찾아와 ‘마당을 나온 암탉’의 저자 황선미 작가(오른쪽)를 만나고 있다. 런던=정진영 기자/123@heraldcorp.com |
▶ 자존심 강한 영국, 한국 문화에 눈 돌리다= 지난해까지 해외에 출간된 한국 문학 서적은 37개 언어권 2820종이며, 이중 영어권에 출간된 서적은 12종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올해엔 15~20종이 더 소개될 예정이지만, 여전히 영어권 출판시장의 진입장벽은 높은 편이다. 런던도서전은 상반기에 열리는 전 세계 도서전 중 가장 저작권 교류가 가장 활발한 행사다. 영어는 가장 넓은 언어권을 확보하고 있는 만큼, 런던도서전에서 주목을 받은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도 주목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코티나 버틀러 영국문화원 문학부장은 “‘마당을 나온 암탉’을 비롯해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도 베스트셀러에 오르는 등 영국 내에서 한국 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며 “한(恨)의 정서 등 독특한 정서와 보편적 주제가 공존하는 한국 문학에 많은 영국 독자들이 공감하고 있다”고 현지 분위기를 전했다.
이번 도서전에는 황선미를 포함해 황석영, 이문영, 이승우, 김혜순, 김인숙, 신경숙, 김영하, 윤태호, 한강 등 한국을 대표하는 10명의 작가들이 각종 문학 행사에 참여해 현지 독자들과 만났다. 이들 행사에는 현지 출판계 관계자들이 대거 참석해 질문을 던지는 등 한국 문학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줬다.
‘마당을 나온 암탉’의 해외 판권 판매를 맡고 있는 이구용 KL매니지먼트 대표는 “영국의 대형출판사들은 아무리 좋은 작품이어도 자존심 때문에 비영어권의 작품을 취급하지 않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며 “그 어느 곳보다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영국에서 열리는 행사에 주빈국으로 초청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한국은 거대한 진입장벽 하나를 넘은 셈”이라고 평가했다.
▶ 한류 정착, 출판문화 세계화에 달려 있어= 지난 2012년 9월 30일, 가수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이 UK 싱글차트 1위에 올랐다. 미국과 더불어 세계 대중음악의 양대 산맥인 영국에서 한국 가수의 노래가 정상을 차지한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싸이의 활약은 아시아권 내에서 한정된 영향력을 보여줬던 K팝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 주목을 받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 같은 분위기에 힘입어 주영한국문화원은 한류 콘텐츠 확산을 위한 한국 문화 교육프로그램인 ‘K팝 아카데미’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싸이의 세계적인 성공과 폭발적인 영향력을 잇는 새로운 콘텐츠의 발굴은 쉽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번 도서전에 참가한 여원미디어의 김동휘 대표는 “K팝과 드라마 등 콘텐츠가 해외에서 인기를 모으고 있지만, 그때뿐인 인기를 끌다가 잊힐 위험성도 크다”며 “도서전에 참여하다보면 한류 콘텐츠로 한국문화를 접한 뒤 한국 관련 서적을 찾는 외국인들을 많이 만난다. 한류 콘텐츠가 유행가처럼 사라지지 않고 정착하려면 기록문화가 반드시 뒷받침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문학 외에도 이번 도서전에서 눈에 띄는 콘텐츠는 웹툰이었다. 지난해 온라인상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린 웹툰 ‘미생’의 윤태호 작가는 8일 주영한국문화원에서 문학행사를 가졌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종류의 웹툰을 연재하는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9일 런던도서전 주빈관에서 현지 출판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웹툰을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윤태호 작가는 “영국 쪽에서 먼저 내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 와 런던도서전에 참여하게 됐다”며 “웹툰은 온라인에 최적화 된 한국 고유의 콘텐츠로 순수문학보다 해외진출이 용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준구 네이버 웹툰사업부 부장은 “영국에는 만화 시장이 거의 형성돼 있지 않은데, 현지에서 한국 웹툰의 수익 모델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오는 7월께 영미권을 대상으로 한 웹툰 홈페이지를 열 예정”이라고 내다봤다.
▶ 여유와 지속적 관심, 출판 한류 성공 열쇠= 2011년 영어판으로 출간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2008년에 국내에선 출간됐다. 지난해 영어판으로 출간된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과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각각 2005년, 2007년 작품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영어판으로 출간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됐다. 또한 이들 작품은 불어판, 독어판, 스페인어판 등 다양한 언어권에 먼저 소개돼 현지 독자들로부터 검증작업을 거쳤다.
이구용 KL매니지먼트 대표는 “‘채식주의자’의 영어판 출간은 7년, ‘마당을 나온 암탉’은 3년이 걸렸다”며 “작품 하나를 해외 독자의 구미에 맞게 편집하고 홍보하는 일은 지난한 과정이기 때문에, 조급하게 성과를 기대하면 안 된다”고 지적했다.
런던도서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전문 번역자의 확보와 국가 브랜드 제고 등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황석영 작가는 “한국 문학을 세계에 소개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점은 좋은 번역자가 많지 않다는 점”이라며 “무엇보다도 전문 영문 번역자를 키워내고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문열 작가는 “서양인들이 한국 문화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어도 실생활에서 쓸모가 없다면 관심을 적게 가질 수밖에 없다”며 “국가의 영향력이 커진다면 한국 문학 번역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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