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소마미술관 10주년, 원로 3인의 종합선물 전시회
라이프| 2014-06-15 10:04
포크레인 한 대가 쓰레기 매립지에 쓰레기를 끊임없이 퍼나른다. 산더미처럼 쌓인 일상의 폐기물들이 영상 밖으로 악취를 내뿜는 것만 같다. 시멘트 블록 위에선 춤을 추는 사람들의 무아지경. 강렬한 비트의 클럽 음악이 가슴을 울린다.

한국의 대표적인 설치미술가 전수천(67)의 영상설치 작품 ‘인터스페이스에서 질주하는 아우라의 현상‘이다. 독일의 문예이론가 발터 벤야민의 ‘아우라’에서 차용한 주제로, 현대 문명사회의 욕망과 배설을 함축적이고도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텍스트를 통해 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 더 이상 아우라는 없다고 말한 반면, 작가는 정서적인 아우라, 감성적인 아우라는 여전히 유효함을 주장한다. 이론적 개념으로서의 아우라가 아닌, 정서적인 아우라를 되찾자는 것이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다.

전수천, 아우라를 그리는 연습(꿈꾸는 아우라), 콜드네온, 콜드네온 트랜스, 종이컵, 전선, LED전구, LED 트랜스, 800x380x800cm, 2014

▶정서적 아우라 상실의 시대…전수천의 설치미술=국민체육진흥공단(이사장 이창섭)이 운영하는 소마미술관(명예관장 장화진)이 올해로 개관 10주년을 맞아 원로 작가 김차섭(74), 전수천, 한애규(61)의 작품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작가재조명_긴 호흡’전이라는 타이틀로 열리고 있는 이 전시는 상업성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고집스럽게 고수해 온 작가들을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됐다. 회화, 드로잉, 영상, 설치 등 작품 120여점이 관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마치 작가 개개인의 개인전을 한데 모아놓은 것처럼 규모가 방대하다.

전수천은 기술복제 시대의 문명과 삶의 변화를 탐색하는 대형 설치 신작들을 선보였다.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대표로 선정돼 국내 최초로 특별상을 받기도 했던 작가는 작품을 통해 아우라의 부재, 결핍의 시대에 인간성 회복이라는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고 있다.

그의 또다른 작품 ‘아우라를 그리는 연습’에서는 ‘정서적인 아우라’의 실체가 조금 더 명확하게 전달된다. 정신, 혹은 지혜를 상징하는 두개의 맑은 빛이 네온등을 타고 수직으로 강하하는 가운데 백여개가 넘는 플라스틱 컵들에는 어제, 오늘, 내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전선으로 이어져 있다. 작가는 “어제, 그리고 오늘을 들여다보며 내일의 아우라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하고자 했다”고 작품 배경을 전했다.

전수천, 아우라의 시간여행, 자동차, 투명스크린, 빔 프로젝터, DVD플레이어, 250x380x500cm, 2014

▶“모든 실존하는 것은 그림자가 있다”…한애규의 테라코타=“모든 실존하는 매체는 그림자를 갖고 있다. 내 실체가 희미해질 때조차도 그림자는 있다. 결국 그림자가 나의 존재를 입증해준다”

흙으로 빚고 뜨거운 불로 굽는 테라코타 작업으로 유명한 한애규는 폐허의 공간을 커다란 기둥과 돌무더기들로 채워놨다. 작가는 ‘그림자 시리즈’를 통해 상념과 소통의 공간속에서 실존에 대해 묻고 있다. 예전엔 사람들로 북적댔을 이 공간이 이젠 그림자만 남아 존재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넙적하게 누워있는 돌덩어리(그림자)들은 아무런 저항없이 시간에 투항한 듯 가라앉아 있다. 결국 흙으로 돌아가고야 마는인간의 육체, 그리고 삶…. 빈 공간속에서 욕망은 휴지기를 갖고 생은 더욱 무상해진다.

도예하는 작가들 중에서도 이처럼 스케일이 큰 설치작업을 하는 작가는 흔치 않다. 청년 못지않은 열정에 연륜의 더께가 내려앉은 작가의 인문학적 통찰력이 돋보인다.

한애규, 여인와상(오른쪽), 테라코타, 131x42x38cm, 2010

▶‘나를 고문하는 것이 당신의 즐거움이다(It’s your pleasure to torture me)’…김차섭의 드로잉=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인류 문명의 운명을 고민해 온 김차섭은 미국 화단에서 더 유명하다.

26세의 나이에 파리비엔날레(1967) 한국 대표로 선정됐고 34세때는 록펠러재단 장학금을 받고 뉴욕 프랫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로 유학을 떠나며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한애규, 그림자-바다, 세라믹, 가변크기, 2014

이번 전시에서 그는 뉴욕의 카페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종이컵들을 펼쳐 그림을 그리고 글귀들을 빼곡하게 적어 넣은 ‘커피컵 시리즈’를 선보였다. 작가가 40여년간 미국 생활을 하면서 이방인으로서 느꼈던 상실감의 흔적이 묻어난 작품이다. ‘당신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의 즐거움입니다(It’s our pleasure to serve you)’라는 커피컵의 글귀를 ‘나를 고문하는 것이 당신의 즐거움이다(It’s your pleasure to torture me)’로 바꿔 놓았다.

뚫린 삼각형 등 기하학적 추상과 신표현주의 방식의 자화상을 포함한 에칭, 드로잉, 작업 노트들도 총망라돼 있다.

전수천, 인터스페이스에서 질주하는 아우라의 현상, 영상설치, 시멘트블록, 빔프로젝터, 250x380x500cm, 2014

한편 소마미술관은 2007년부터 작가재조명 전시를 기획했다. 2007년에는 김주호, 이건용, 박한진을, 2009년에는 신성희, 한순자 등 끊임없는 창작열을 보여주며 소신있는 작업을 해온 작가 2~3명을 격년으로 초대해 전시를 열고 있다.

‘작가재조명_긴 호흡’전은 7월 27일까지. 

김차섭, 커피컵 시리즈 중 일부, 종이컵 위에 혼합재료, 1984~1989

김아미 기자/amig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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