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분쟁
청·일전쟁 120년…역사는 반복되는가
뉴스종합| 2014-07-09 11:39
120년 전인 1894년 7월 25일 아산만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나라 함대를 기습공격했다. ‘풍도해전’에서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일본은 4일 후 충청도 성환에서 전투를 벌여 당시 아산만에 주둔해있던 청나라 육군을 격파했다. 양국 간 외교관계는 단절됐고 8월1일 정식으로 전쟁이 선포되면서 청·일전쟁의 막이 올랐다.

성환전투에서 승리한 일본 육군은 북진해 평양에서 청군과 전투를 치러 9월16일 평양 입성에 성공한다. 잔존 청나라 병력은 평양을 빠져나와 의주로 후퇴했다. 다음날인 9월17일 일본의 연합함대와 청나라 북양함대가 압록강 하구에서 대규모 해전을 벌인다. 바로 ‘황해해전’이다. 일본 연합함대는 ‘아시아 최강’이라는 청의 북양함대를 궤멸시킴으로써 메이지 일본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로써 일본은 제해권을 확보하게된다. 이후 일본군은 10월에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했고 일부 병력은 랴오둥(遼東)·산둥(山東)반도에 상륙했다. 그해 11월 뤼순(旅順)항이 점령되면서 승세는 일본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청·일 전쟁은 육지, 바다 모두 일본의 연전연승이었다. 전쟁은 8개월이라는 단기간에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다음해인 1895년 4월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의 독립을 인정, 조선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배상금 2억량도 일본에 지불했다. 이 금액은 당시 청나라 세입총액의 2년반 분량이었다. 랴오둥반도, 대만, 펑후(澎湖)제도도 일본에 할양되면서 일본은 아시아 최초의 식민지 제국이 됐다. 시모노세키조약 교섭이 시작되기 직전인 1895년 1월 일본 내각은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의 영유도 결정했다.

중국에선 갑오(甲午)년에 일어났다고 해 ‘갑오전쟁’으로 불리는 청·일전쟁은 청나라의 무력함을 여실히 드러낸 전쟁이다. 나아가 중국인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 전쟁이기도 하다.

청·일전쟁 이후 세계 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은 더욱 노골화됐고 일본은 더욱 적극적으로 조선 병합의 야욕을 드러내며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전쟁은 일본군의 막대한 희생끝에 일본의 승리로 귀착됐다. 1910년 마침내 일본은 조선을 병합했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120년 전의 역사를 새삼 주목하려는 것은 현재 동북아시아 정세가 그때와 매우 흡사하기 때문이다.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미국과 일본, 이에 맞서 변화를 모색하는 중국이 충돌하는 양상이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사이에 끼여 있는 우리에게 앞으로 닥칠 상황은 엄혹할 것이다. 이런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국익이 결정된다. 청·일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편협한 정세인식으로 외교적 실책을 범했고 결국 우리 민족은 망국의 한을 안게됐다.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려선 안 된다. 냉철한 현실인식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상이란 기초 위에 주변 강대국들의 의도에 농락되지않고 살아나갈 길을 찾는 것이 당장 우리에게 떨어진 시급한 과제다. 

박영서 베이징 특파원/ py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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