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죽음과 상처, 사랑에 대한 통찰
라이프| 2014-09-26 11:05
약혼/이응준 지음/문학동네
죽음과 상처는 맹렬하고도 급작스럽다. 사납고 뜨겁게 삶에 덤비며, 그 위세도 시기도 짐작할 수 없다. 우연과 운명의 자기장 속 어딘가에서 발화(發火)한 죽음과 상처는 사랑 혹은 관계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연애담은 현재진행형일 수 없다. 늘 맹렬한 폭풍이 지나간 후, 허허롭게 빈 공간에서 되새김하는 상실의 흔적이며, 뒤늦게 부르는 ‘너의 이름’, 곧 나의 상처일 뿐이다. 

존재와 관계가 오로지 죽음과 상처로만 표식을 드러낸다면, 그러한 비극적 인식은 급기야는 ‘종교성’의 영역에까지 이른다. 예컨대 “신은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나타난다. 그 결과가 고통받은 너다. 어째서 나는 내 고통을 사랑했을까.”와 같은 선언적 문장이다.

소설가 이응준(44)의 소설집 ‘약혼’이 최근 쇄를 달리해 출간됐다. 지난 2006년, 작가가 36세 때 펴냈던 1쇄를 개정한 것이다. 관계에 대한 회의를 바닥까지 끌어내리고, 삶의 비극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30대 젊은 작가의 사유는 몇 년의 세월을 견뎌내고서도, 더욱 단단해진 고갱이를 드러낸다. 작가의 말처럼 출간 당시 독자들의 외면으로 “내가 작가라는 게 싫어질만큼 큰 고통”이었고, “제 작가를 따라 조용히 잊혀졌던“ 이 소설집을 다시 펴낸 이유이리라.

황송할만큼의 상대가 ‘나’에게 사랑고백을 한 뒤 일주일만에 자살한 사건과 존경하던 스승의 죽음을 맞게 된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린 ‘내 어둠에서 싹튼 것’, 어린 시절 중학생 사촌형이 광견병에 걸려 죽은 것을 지켜본 친구와 조카 두 명을 빙판 사고로 잃은 ‘나’와, 육손이로 태어나 평생 매끄러운 다섯손가락을 동경하던 여인이 등장하는 ‘약혼’, 자살한 아내의 보상금으로 살아가는 남자와 옛 연인을 다시 만난 정수기판매원 ‘나’를 그린 ‘네가 계단에 서서 나를 부를 때’ 등 총 9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현상’으로부터 비약해 ‘통찰’에 이르고자 하는 의지가 때로 무모하리만큼 관념적이며 선언적인 구절을 빚어내지만, 그것을 상쇄할만큼의 엄격한 문장과 치열한 사유가 힘을 발하는 작품이다.

이형석 기자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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