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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리치-하이라이프] ‘미술관 옆 회장님’, 슈퍼리치 컬렉터..
뉴스종합| 2014-10-01 10:16
[특별취재팀=김현일 기자] 글로벌 화장품 기업 에스티 로더의 레오나드 로더 명예회장(82)은 억대의 돈도 아끼지 않고 미술품 구매에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지난해 4월 그는 그간 사들인 미술품 78점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했다. 돈으로 환산하면 총 11억 달러에 달하는 작품들로, 당시 레오나드 로더의 자산 81억 달러(포브스 기준) 중 13.5%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멕시코 통신재벌 카를로스 슬림(75)이 요즘 빠져 있는 분야도 미술이다. 그는 2011년 8억 달러를 들여 멕시코시티에 소마야(Soumaya) 미술관을 세웠다. 여기에는 슬림이 좋아하는 로댕의 작품을 포함해 살바도르 달리,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이처럼 미술계에서 슈퍼리치들은 ‘슈퍼 컬렉터(수집가)’이기도 하다. 손에 쥐고 있는 막대한 부를 고가의 미술품을 수집하는 데 투입하며 미술계에서 슈퍼 파워를 행사하는 중이다. 그렇게 모인 미술품 컬렉션은 슈퍼리치들의 재력 뿐만 아니라 예술을 바라보는 그들의 안목까지 엿볼 수 있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국내에선 주로 재벌가의 ‘사모님’이나 딸 등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왔지만 최근엔 젊은 남성 오너들도 미술품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미술이 경영의 한 축으로 자리잡았다.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과 한솔이 설립한 미술관 ‘뮤지엄 산’의 전경

▶재벌가 1세대 여성 컬렉터 한솔 이인희ㆍSK 고(故) 박계희=이인희 한솔그룹 고문(87)은 재벌가의 대표적인 미술 애호가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녀인 그는 이 회장의 미술품 수집 취미를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면서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고문의 컬렉션은 작년 5월 강원도 원주에 문을 연 ‘뮤지엄 산(구 한솔뮤지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해발 275m에 위치한 이 미술관은 세계적인 일본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해 개관 전부터 화제가 됐다. 또 세계적인 ‘빛의 작가’ 제임스 터렐의 작품(겐지스필드, 웨지워크, 호라이즌, 스카이스페이스)이 아시아 최초로 4개나 설치돼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야외에는 골프 코스를 따라 국내 작가 최만린과 영국 작가 헨리 무어의 조각품이 설치돼 있는 등 오랜 기간 미술품을 수집해 온 이 고문의 역량이 집중된 곳이다.

고 최종현 전 SK 회장의 부인이자 워커힐 미술관의 관장이었던 고 박계희 여사 역시 생전에 손꼽히는 미술품 컬렉터였다. 미국 미시간주 카라마주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1984년 워커힐미술관을 설립하고, 국내 최초로 앤디 워홀전(展)을 열어 주목 받았다. 또 피카소와 호펜하임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신진 작가 발굴에 앞장서는 등 미술계에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1997년 타계한 후 그의 미술 사랑은 며느리 노소영 씨(54)가 이어받았다. 서울대 공대 출신인 노 씨는 2000년 아트센터 나비를 개관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뛰어들었다. 시어머니가 회화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면 노 씨는 디지털 기술이 결합된 미디어 아트 분야에 높은 수준을 지니고 있다. 미술관 곳곳에도 다양한 미디어 아트 작품들이 설치돼 있다. 아트센터 나비 설립 당시 이 분야 전문가를 찾을 수 없어 본인이 직접 맡아서 하다 보니 지금의 수준에 이르게 됐다고 밝힌 바 있다.

‘아트센터 나비’의 노소영 관장(오른쪽)과 전신 ‘워커힐 미술관’의 관장이었던 최종현 SK회장의 부인 박계희 여사(왼쪽)

▶ 미술계 ‘슈퍼 파워’ 삼성 이건희ㆍ홍라희 부부=삼성은 리움을 비롯해 호암미술관, 플라토(구 로댕갤러리)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부인 홍라희 씨(70)가 이들 미술관의 관장을 맡고 있다. 호암미술관은 고 이병철 회장이 수집한 고미술품을 공개하기 위해 1982년 개관했다. 리움은 고미술품에 홍라희 관장이 관심을 갖고 있는 현대미술품까지 소장품의 폭이 넓다. 한남동에 위치한 리움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인정받을 정도로 뛰어난 디자인을 자랑한다. 설계 및 디자인은 건축계 3대 거장 스위스의 마리오 보타, 프랑스의 장 누벨, 네덜란드의 렘 콜하스가 맡아 화제가 됐다. 서울대에서 응용미술학을 전공한 홍라희 관장은 1983년 현대미술관회 이사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대외 활동을 시작한 바 있다. 최근 이건희 회장이 입원한 후 외부 행사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홍 관장이 4개월 만에 나선 공식 행사도 리움에서 열린 미술행사였다. 

삼성 홍라희 여사가 관장을 맡고 있는 호암미술관, 플라토, 리움(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미술에 빠진 ‘美男’ 신세계 정용진ㆍ대림 이해욱=미술은 더 이상 딸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본격 경영에 나선 30~40대 아들들이 예술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미술은 재벌가의 단순 취미활동에서 벗어나 사업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 덩달아 젊은 오너의 취향과 감각도 경영능력의 한 요소로 주목받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명동 본점 6층에 조성된 트리니티 가든에는 제프 쿤스의 ‘세이크리드 하트(Sacred Heart)’와 루이즈 부르즈아의 ‘아이 벤치(Eye BencheⅢ)’ 등 유명 작가들의 조각품들이 전시돼 있어 흡사 작은 미술관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모두 정용진 부회장(47)의 ‘아트 마케팅’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정 부회장은 2007년 신세계백화점 본점 리모델링 후 재개장하면서 매장 곳곳에 유명 조각과 회화 100여 점을 설치하는 등 ‘미술관 같은 백화점’으로 꾸몄다. 문화예술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경영에도 이같이 감성적인 요소를 입히고 있는 중이다. 

대림미술관의 관장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왼쪽)과 제프 쿤스의 ‘세이크리드 하트’ 등 신세계백화점 본점에 작품 설치를 주도한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대림그룹의 대림미술관 주인도 여자가 아니라 바로 대림산업 이준용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대림산업의 부회장인 이해욱 씨(47)다. 석유화학과 건설이라는 ‘무거운’ 산업을 양축으로 하고 있는 대림그룹에서 아들이 미술관장을 맡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이 부회장은 모친 한경진 여사가 관장으로 있을 때부터 대림미술관 운영에 관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만큼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으며 재즈와 드럼연주를 좋아하는 등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53)도 미술에 관심이 많다. 태광그룹 금융계열사인 흥국생명 건물 자체가 갤러리일 정도다. 흥국생명 빌딩 앞에 설치된 조너던 브로프스키의 조각품 ‘망치질 하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로비에는 강익중 작가의 대형 벽화 ‘아름다운 강산’이, 로비 뒤쪽에는 세계적인 조명 아티스트 잉고 마우러의 ‘홀론스키 사열’이 전시돼 있다. 태광그룹은 1990년부터 일주학술문화재단을 만들어 장학사업과 문화예술지원사업을 해왔다. 이 회장의 모친 이선애 여사가 관장을 맡고 있는 ‘일주&선화갤러리’는 2010년 흥국생명 건물 3층에 문을 열었다.
 
아트선재센터를 운영 중인 김우중 대우 회장의 부인 정희자 관장.
  
▶모기업 몰락에도 불구 변함없는 미술사랑=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정희자 씨(75)는 아트선재센터 관장을 맡아 지금까지 미술관을 운영해오고 있다. ‘선재’는 1990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아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2011년 정 관장의 고향 경주에 있던 경주 선재미술관이 매각되면서 아트선재센터만이 대우가(家)의 유일한 미술관으로 남았다. 정 관장은 과거 대우그룹이 전 세계 호텔 건설에 활발하게 나설 때 그곳에 필요한 그림을 고르면서 자연스레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양대 건축학과 졸업 후 홍익대 대학원에서 미술사학을 전공한 그는 1976년 37세의 나이에 하버드대에 진학해 동양미술사를 공부하는 등 대우그룹의 예술경영을 안팎으로 도왔다. 2012년 프랑스 명품 브랜드 몽블랑이 문화예술 분야 발전에 기여한 인사에게 수여하는 ‘제21회 몽블랑 후원자상’의 첫 한국 여성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뒤늦게 그의 공헌이 인정받기도 했다.
 
최근 성곡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연 김성곤 쌍용 창업주의 장녀 김인숙 씨.

쌍용그룹 창업주 고 김성곤 회장의 호를 따 1995년 설립된 성곡미술관은 현재 쌍용그룹 김석원 전 회장의 부인 박문순 씨(61)가 관장을 맡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쌍용그룹의 위세는 약해졌지만 성곡미술관은 자체적으로 신진 작가를 발굴하는 등 예술 사랑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에는 교수에서 공예가로 변신한 김성곤 회장의 장녀 김인숙 씨(75)가 이곳에서 구슬공예품 전시회를 여는 등 쌍용가(家) 여성들이 중심이 돼 예술사업의 명맥을 이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 밖에 미국의 유명 미술잡지 ‘아트뉴스’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200대 컬렉터’ 명단에 7년째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한국인이 있다. 바로 김창일 아라리오그룹 회장(64)이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하다. 아라리오는 충남 천안의 향토기업으로 부동산과 건설을 주요 사업으로 하고 있다. 김 회장은 작년 말 한국 1세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서울 종로의 공간(空間)사옥을 인수해 지난 달 미술관으로 재개관한 바 있다.

joz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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