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한글과 세종의 애민정신
라이프| 2014-10-15 11:35
지난 10월 9일 오후 6시에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에서는 전통복식 연구가인 이순화 패션디자이너가 세종대왕을 주제로 하여 ‘최초 종합예술 공연패션쇼’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필자는 그날 행사에서 ‘태종’ 역할을 맡아 당시 왕의 복식을 재현해 관중들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물론 이렇게 뜻 깊은 행사에 참여할 수 있는 것 만으로도 큰 영광이었지만, 무엇보다 필자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 것은 패션쇼장의 대형화면에 자막처리 된 ‘훈민정음’ 서문이였다.

“나랏말씀이 중국의 말과 달라, 한자와 잘 통하지 아니하여 어리석은 백성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이가 많으니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자를 만드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늘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함이라”

훈민정음은 세종이 즉위한지 28년이 되던 1446년 반포됐다. 당시 사대사상에 젖은 일부 관리들은 이를 극렬하게 반대하며 특히 문신 최만리는 ‘한자를 사용하지 않고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오랑캐나 하는 짓’이라고 주장하였지만, 세종은 “쉬운 새 문자를 배워서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다면 누가 한자를 배우고 누가 유교 경전을 공부하겠는가”라고 응대하며 이러한 주장을 물리쳤다고 한다.

제 나라 말이 없어 백성을 가엾게 여긴 세종대왕이 핍박 속에서도 지켜낸 우리말. 한때 국가 공휴일에서 제외되기까지 하는 수난사를 겪으며, 대한민국 역사의 면면을 기록해 준 ‘한글’이라는 보석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과연 어떤 의미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창제자와 창제 이유를 아는 세계 유일한 문자”라 불리우는 표음문자 한글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소리를 글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에 전세계 공통 발음기호로 한글을 내세우는 언어학자들이 있을 정도라고 한다.

근자에 필자는 서촌 ‘세종마을’을 방문했다. 이곳 준수방 장의동 본궁에서 세종대왕이 태어나셨기에 2010년부터 주민들이 이렇게 부른다. 경복궁역을 출발해 시인 이상 집터, 박노수 화백의 미술관, 윤동주 문학관까지 600여채의 한옥과 옛 골목들이 어우러져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1397년 종로구 통인동일대(한양 북부 준수방)에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450년 54세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세종대왕. 태종은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모든 억압은 내가 가지고 가니 너는 태평한 시대를 열어라”라는 말을 했다. 태종의 염원대로 세종은 우리나라의 전 왕조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장식했다.

‘세종마을’ 이상의 집터를 지날 때, ‘날개’의 기억나는 문구들이 스쳐지나간다. 시인 윤동주 문학관 앞에서는 세상사에 지쳐있을 때마다 읊조리던 ‘별헤는 밤’을 떠오른다. 그뿐이랴. 여기저기 붙어 있는 한글 푯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정성스레 읽을 때의 감동은 또 어떤가.

불현듯 세종대왕은 위대한 한글창제에 주목적이 있었던게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찮은 미물에도 귀하게 이름을 매겨주어 그 존재에 빛을 불어넣는 일, 그리하여 먼 훗날 현재의 아름다운 시절을 기록하고 후세에 감동을 더 하는 것. 어쩌면 ‘한글’은 그의 한없는 ‘사랑’이 만들어낸 최고로 견고한 결과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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