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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나를 만든건 초등학교 교생 선생님"
뉴스종합| 2014-10-15 11:20
‘진보 교육감’ 이미지 탈피 ‘균형교육’ 강조…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참교육 철학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집무실에는 자전거 한 대가 놓여 있다. 취임 100일을 맞아 가진 기자회견장에 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했다. 그때 조 교육감이 던진 화두는 바로 ‘균형’이다. ‘진보 교육감’이라는 딱지를 불식하기 위한 것으로, 균형 감각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교육에는 진보도 보수도 없다’는 인식 속에서 그에게는 ‘균형’이라는 단어는 ‘시지푸스의 돌’과 같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올리지만, 산꼭대기에 이르면 바위는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이러한 고역을 영원히 되풀이하는 시지푸스처럼 교육감 자리에서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채찍질을 가하게 하는 매개물이 바로 자전거다.

지난 7월 취임 이후 자사고 지정 취소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전임자 미복귀 처리 문제 등 교육계 가장 뜨거운 이슈들로 바쁜 그를 15일 서울시교육청 교육감실에서 만났다. 실타래처럼 얽히고 설킨 현안과 정책들에서 한발 물러서 ‘인간 조희연’ 얘기를 들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집무실 한쪽에는 자전거가 놓여 있다. 자전거는 그에게 거울이다. 그는 “자전거는 교육과 많이 닮았다”고 말한다. 전진하기 위해선 반드시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심잡는 것, 균형을 잡는 것. 그가 생각하는‘ 교육’이다. 취임 100일을 맞아 기자회견
을 할때 자전거를 끌고 간 것은 이같은 생각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김명섭 기자/msiron@heraldcorp.com

▶그때의 교생 선생님, 지금 생각해도 애틋=5남2녀 중 5남으로 태어난 조 교육감은 5살 때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재혼하면서 교회와 공부에만 열중하는 조용한 아이로 자랐다. 공부도 곧잘 하고 사고 치지 않는 모범생이었지만, 부모님과의 관계는 무미건조했다. 고등학생 때 서울로 유학을 와서도 2~3개월에 한번씩 아버지께 편지를 써서 건조한 인사말 한두 마디만 급하게 건넨 뒤 ‘다름이 아니옵고’로 시작해 학비와 생활비를 요청하는 것이 전부였다.

조 교육감은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마음의 짐을 지고 있는 듯 했고, 그래서 우연히 발견한 당신의 삶을 적은 일기를 묶은 것이 ‘뜻밖의 개인사’라는 책”이라고 했다.

조 교육감도 인정한다. “전형적인 모범생 스타일이라 재미는 좀 없었다”며 운을 뗀 그는 “어릴 때 기억에 남는 일 중의 하나는 전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닐 때 전주교대 교생 선생님을 무척 좋아했었다”며 “같은 반 아이들 8명하고 같이 전주 경기전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아직도 사진을 보면 애틋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이 대목에선 얼굴에 가벼운 미소가 스쳤다.

김명섭 기자 msiron@heraldcorp.com

학창 시절의 한 부분은 교회 활동이 차지하고 있었다. “전주 동북교회를 다녔고 중등부 때는 회장을 했는데, 교회 안 나온 아이들 집을 일일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닐 정도로 부지런하고 열성이었습니다. 지금도 생각나는 친구 한명은 중1때 무지하게 음치였는데, 중3이 되니까 성가대를 할 정도로 음정을 잘 맞추기에 친구들이랑 ‘신앙의 힘은 위대하다. 음치도 고칠 수 있다’고 말하며 놀렸던 적이 있어요.”

서울로 유학 와 서울대에 입학하며 무난한 학창시절을 보낸 조 교육감에게도 시련은 찾아왔다. “제가 굉장히 낙천적인 성격이라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에 빠졌던 적은 없는 것 같다”면서도 독재 반대 시위에 가담해 실형을 선고받고 가석방돼 출소하니 아버지가 “평생 뭐 먹고 살래? 독립운동 했던 사람들 자녀들은 다 어렵게 산다는데…” 하시며 안타까워 하셨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70년대 말에는 대학생들 사이에 현장론이 득세하고 있었다. 목적의식적으로 노동자 되겠다는 현장론이 거셌고, 감옥을 가거나 제적을 당하면 직업을 가질 희망이 없었다. 조 교육감은 “출소 이후 익산 고향에 돌아가서 과외를 했다. 하다가 다른 출구가 없어서 생각한 것이 열관리 관리사 자격증을 따 노동자의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시험에는 일가견이 있어 필기시험은 단박에 통과했지만, 보일러를 본 적이 없는 그에게 실기시험은 어떻게 손을 댈 수 없는 것이었다. 본격적으로 실기시험을 준비하려던 차에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서울의 봄’이 나고 겨우 복학하게 됐다.

다시 대학을 다니게 된 조 교육감은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마련해 준 은사를 만나게 된다. 진보학자인 고 김진균 교수다. “80년대 김진균 사단으로 있었다는 것은 굉장한 행복이자 자랑입니다. 아직도 마음 속에 김진균 선생이 살아계십니다. 선생이 꿈꾸셨던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잃지 않을 것입니다.”

1983년 김진균 교수와 제자들이 모여 채 10평도 안되는 ‘상도연구실’에서 민중사회학을 태동시켰고, 한국산업사회연구회(산사연, 현 산업사회학회)는 ‘김진균사단’이라고 불렸다. 그가 가진 김 교수에 대한 기억은 ‘너른마당’이라는 별칭처럼 포용적이고 온화하며 사람을 아끼는 분이셨다. 고은 선생도 ‘만인보’에서 선생을 ‘항아리 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했듯이….

“선생님은 사실 별말씀을 안하시는 데도 굉장히 많은 말씀을 하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해결점을 찾을 수 있도록 옆에서 추임새를 넣어주신다고 할까, 그렇게 툭 건드려 주는 역할을 해 주셨죠.” 또 덧붙인다. “‘개인의 사익보다는 사회의 공공적 이익을 추구하라’는 정의의 감수성을 저희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하신 것 같아요. 특히 선생님은 굉장히 성실하신 분이셨습니다. 교육감 선거과정에 ‘진심 교육감’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는데, 선생님의 이미지를 닮고 싶고 견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 철학은 학벌과 학력에 따른 보상 격차 줄이는 것=조 교육감은 “스스로를 ‘2선 지식인’이라고 표현하는데, 당시는 대학원에 가면 부끄러운 일이고, 노동자가 되면 존경스러운 삶을 사는 것으로 인식되는 때였다. 100%를 다 던진 친구들에 비하면 저는 기득권도 지키면서 2선에서 따라가는 지식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한 부채의식을 가지고 2선 지식인으로 30년간 살아오면서 지켜왔던 진보적 가치를 교육 영역에서 실현하려고 나름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사고 재지정 등 현안들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조 교육감은 아버지로서 아들들의 외고 진학에 굳이 변명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아이들이 공부를 웬만큼 했었고, 부모의 의사라기보다 아이들 본인이 많이 원해서 갔었다. 어찌됐건 송구스러운 마음”이라며 “그러나 아들이 외고에 가기 위해서 1년 반동안 컴컴한 독서실에서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이래선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가졌고, 그래서 황폐화되고 왜곡된 대학 입시체제가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는 “시민운동을 한 사람으로서 아들을 외고에 보냈다고 비판하신다면 달게 받겠다. 하지만 교육감 조희연은 사적인 판단이나 이해관계에 의해 의사결정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모두 비합리적인 입시 경쟁 체제 안에서 경쟁하고 있고, 지금 그 체제를 고치려고 애쓰는 점에 주목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인터뷰가 진행되면서 인간 조희연은 교육감 조희연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조 교육감은 “학벌체제, 입시체제가 떡 버티고 있고, 그 뒤에는 또 엄청난 격차가 있는 사회불평등 시스템이 있다”며 “초중등교육에서 혁신해도 한계가 있지만, 정부든 누가 개입하든 최소한 학벌과 학력에 따른 보상의 격차를 완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부모 입장에서 보면 세상이 너무 험악하니까 ‘비정규직이 될까’, ‘좋은 직장에 가도 사오정이 될까’ 등 이런 불안이 있어요. 그러다보면 좋은 학벌, 좋은 대학 보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겁니다. 그렇게 하려면 고등학교 때부터 움직이고, 다른 사람이 하기 전에 중학교부터 준비를 시키면서 학대는 시작됩니다.”

“교육시스템, 대학 학벌 체제, 그리고 사회경제적 격차 시스템을 공공적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과정이 진정한 의미의 선진화”라고 규정하는 그에게선 힘이 느껴진다.

“네가 젊었을 때는 마음대로 다녔지만, 네가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이 와서 네 허리에 띠를 두르고 원하지 않는 걸로 데려가리라.”

조 교육감은 교육감으로서 사명감을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그는 “베드로 순교의 상징적인 구절로 해석하는데 운명에 순응하듯이 제 2의 인생을 사는 심정으로 교육감직을 수행하고 있다”며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대한 경청까지 이루지 못한 것 같다. 경계를 횡단하는 경청, 더 원숙한 경청의 미덕을 갖추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조 교육감은 이 단어를 매일 곱씹는다.

“정치형 교육감, 행정가적 교육감, 초중등교육의 틀 안에서만 교육을 고찰하는 교육감을 넘어서서 사회를 크고 넓고 깊게 바라보며 사회와 교육의 근본적인 관계를 성찰하는 교육감,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의 미래상까지 함께 고민하는 그런 교육감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싶습니다.”

인터뷰=김영상 사회부장/ysk@heraldcorp.com

정리=이태형 기자/th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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