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회에서는 호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금속활자로 인쇄한 전적(典籍)과 문방사우가 소개된다. 세계에서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하고 현존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꼽히는 ‘직지(直指)’를 찍어낸 우리 옛 기술과 문화가 조선시대에 어떻게 꽃피웠는지를 살펴보는 전시다. 금속활자 인쇄술은 활자 제작뿐만 아니라 조판기술, 제지기술, 금속활자에 적합한 먹의 제작 등 인쇄에 필요한 기술이 집약되어야 실현 가능한 것이었다. 이번 전시회는 조선시대 금속활자를 이용한 국가 통치 이념의 전파와 문화 부흥의 양상을 조명한다.
전시회에선 조선시대 금속활자로 인쇄한 전적(典籍)들을 크게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책으로 기틀을 세우다’와 ‘조선 후기의 금속활자-책으로 문화를 부흥시키다’로 나누어 선보인다. 더불어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국가의 주축인 사대부들이 책과 함께 애호했던 문방사우와 책가도 등 회화 작품도 함께 전시한다. 조선 전기의 금속활자본 중에선 건국 이후 통치 자료로 삼기 위해 ‘경자자(庚子字)’로 인쇄한 금속활자본이 있다. 주희가 편집한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논어의 가르침을 주제별로 분류한 ‘근사록’(近思錄) 등이다. 세종대 때 제작된 ‘자치통감강목’은 ‘경연(經筵)’이란 인장이 찍혀 있어 세종이 20여년 동안 매일 참석했던 신하들과의 경연에 사용한 책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 금속활자본으로는 ‘맹자언해’(孟子諺解) ‘주서백선’(朱書百選), ‘사기영선’(史記英選)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정조가 직접 선정했기 때문에 책 이름 앞에 ‘어정(御定)’을 붙여 부르기도 한 왕실 간행본으로 당시 금속활자본 간행을 통해 문화 부흥을 꿈꾸었던 정조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이번 전시회는 조선 왕조의 서적 보급을 통한 통치 이념의 전파와 금속활자 기술 활용에 대한 흐름과 역사를 보여준다. 조선왕조 개창의 주역이었던 정도전은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여 금속활자 인쇄를 제안했으며 1403년 태종대 때 실현됐다. 태종은 금속활자를 제작하는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조선 최초의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금속활자 인쇄술은 세종대 때 정착됐다. 세종은 인출량과 품질을 대폭 개선한 ‘경자자(庚子字)’를 제작했다. 서체의 아름다움 덕분에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6번이나 다시 만들어진 ‘갑인자(甲寅字)’ 역시 세종대에 처음 제작됐고, 이는 금속활자 인쇄술의 완성으로 꼽힌다. 또 진양대군(세조)의 서체를 바탕으로 제작한 ‘병진자(丙辰字)’는 세계 최초의 납활자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세종대 때 정착된 금속활자 기술은 세조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꽃을 피웠다. 세조는 당대 명필가였던 강희안과 정난종의 서체를 바탕으로 각각 ‘을해자(乙亥字)’와 ‘을유자(乙酉字)’를 제작하게 하는 한편 자신이 직접 글자를 쓴 ‘정축자(丁丑字)’도 만들었다. 이후의 여러 왕들도 금속활자 제작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이로 인해 조선 전기는 금속활자 인쇄술의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은 모든 분야에 걸쳐 조선에 큰 손실을 입힌 전란으로 서적의 손실 역시 막대했다. 화재에 의한 손실 못지않게 일본으로 약탈된 수도 많았으며 금속활자와 활판 등의 인쇄도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금속활자 인쇄 문화는 임진왜란 이후 한동안 중단될 수 밖에 없었으며 금속활자를 다시 복구한 것은 광해군이었다. 광해군은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여 금속활자 전성기를 다시 재현했다. 이 때 제작된 활자는 갑인자 계열의 ‘무오자(戊午字)’이다. 그러나 전란 직후의 정치 ·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크게 번성하지는 못했다.
광해군 이후 숙종대에는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이 쓴 글자를 바탕으로 ‘원종자(元宗字)’를 제작했다. 이후 정조대에는 주자소(鑄字所)를 복원하여 ‘정유자(丁酉字)’ · ‘임인자(壬寅字)’ · ‘정리자(整理字)’ 등을 각각 수십만 개의 활자로 제작했고 규장각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출판 사업을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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