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태어남, 걸음마, 첫 키스…모든 첫경험은 지극히 철학적인 순간이다’
라이프| 2014-10-31 09:44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지음, 남경태 옮김/웅진지식하우스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소비에트의 러시아어 사전은 키스를 순전히 기계적인 견지에서 구강막의 상호 영향, 타액 생산의 증가, 특정한 신경 조직의 활동으로 정의했다. 키스와 관련된 낭만적이거나 성적인 요소는 배제하고, 전체 행위를 기능적 요소로만 환원시켰다. (중략) 하지만 키스는 즐거운 놀이이며 유쾌한 숨바꼭질이다. 셰익스피어 애호가들이 암시하듯이 깃털처럼 가볍고 기도처럼 엄숙하다. 키스는 그물처럼 드리워져 희망, 기대, 열망, 호기심, 안도감, 방종 등 가슴 두근거리는 모든 느낌들을 사로잡으려 한다.“

한국 사람이라면 만해 한용운의 ‘님의 침묵’ 중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라는 싯구를 가져왔을테지만, 저자가 영국인인 것을 어쩌랴. 영국의 문학자이자 철학자인 로버트 롤런드 스미스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키스 장면부터 시작해 이마누엘 칸트의 ‘숭고미’로서의 예술에 관한 미학이론, 오귀스트 로댕과 브랑쿠스, 두아노의 키스상(키스 사진), 애덤 필립스의 정신분석학을 불러낸다. 로버트 롤런드 스미스가 지은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의 ‘첫 키스’ 항목이다.

최근 번역 출간된 이 책은 일단 매우 매력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태어남에서 걸음마와 옹알이, 학교, 자전거, 시험, 첫 키스, 순결의 상실, 운전면허, 첫 투표, 취직, 사랑, 결혼, 출산, 이사, 중년의 위기, 이혼, 은퇴, 늙어감, 죽음, 내세까지 인생의 20단계를 ‘철학’으로 성찰했다. 재미있지만 가볍지 않다. 재치 있는 발상과 넓고 깊은 사유가 만났으니 아주 괜찮은 지적 유희라 할만하다. 저자는 거의 모든 철학사와 과학사, 사회 이론을 자유롭게 횡단한다.

프랑스 영화감독 장 뤼크 고다르를 인용하면서 시작하는 이 책은 첫 항목인 ‘태어남’에서 데이비드 흄의 경험론과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하이데거의 ‘현존재’를 경유하며 출생의 기적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사유한 사르트르에 따르면 태어난다는 것은 “스포츠카를 받고서 곧바로 열쇠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는 식이다. 걸음마는 “지상에 자신의 장소를 만들고 일종의 자서전을 새기는 것”이며, 첫 입학은 루이 알튀세의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에 호명됨으로서 구조되고 복원되는 것’이고, 폴 리쾨르의 의미대로라면 ‘타자로서의 자신이 되는 첫 경험’이다. “아빠, 손 놓지 마!”를 외치다가 결국은 균형잡기에 성공하는 자전거는 부모의 그림자를 벗어나 홀로 떠나게 되는 인생이라는 비유이자, “낯익은 것과 낯선 것 사이의 틈을 뛰어넘는 일”이다. 즉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에서 말하는 “결정의 광기”이고 “이성이 행위의 이름으로 불안에 처하게 되는 어지러운 분열의 순간을 끌어안는 일”이다.

생각보다 읽기에 만만치 않은 에세이이지만, 철학을 통해서 본 인생의 계기, 세상의 모든 첫 경험의 순간들은 경이롭고 감동적이다. 첫사랑에 빠진 청년, 결혼을 앞둔 커플, 첫 아이를 본 젊은 엄마 아빠, 걸음마와 자전거타기로 인생 홀로서기를 시작한 자녀를 둔 부모, 이혼과 중년의 위기를 맞은 부부, 살아온 세월보다 살 날이 짧은 노년, 그 모두에게 적어도 한 문장 정도는 짜릿한 전율을 안겨줄 책이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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