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개벽,사상계에서 선데이서울까지…잡지로 본 현대사
라이프| 2014-11-06 08:38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천정환 지음/마음산책
[헤럴드경제=이형석 기자] 총과 법과 필(筆)이 다투던 역사였다. 서로 다른 완력과 원리로 각자의 국가와 민족, 국민, 민중을 주장했다. 그러하니 진위와 시비를 가려내자는 계몽과 사상의 시대가 뜨거웠다. ‘개벽’과 ‘사상계’와 ‘창작과 비평’과 ‘씨알의 소리’와 ‘뿌리깊은 나무’ ‘현실과과학’으로 내려온 시대였다. 역사와 대결하며 미추를 다루는 문학과 예술도 역사의 격랑에 몸을 실었다. ‘문학’과 ‘문예’와 ‘현대문학’과 ‘문학과지성’과 ‘문학사상’ ‘문학동네’의 이름으로 궤를 이루는 역사다. 

물론 권력과 법과 정치와 문학과 예술, 거의가 남자 어른들이 쟁투하는 ‘판’이었지만, 그 곁에서는 늘 ‘어린이’와 ‘청년학생’, ‘여성’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물줄기가 샘솟았다. ‘새소년’과 ‘학원’, ‘진학’ ‘여학생’, ‘여원’ 들이다. 역사의 물길을 틀어쥐고 바꾸려는 힘들이 대결하는 동안 그저 시류에 몸을 맡긴 대중과 통속의 저류도 있었다. ‘야담과 실화’와 ‘선데이서울’이 대표하는 성과 가십, 욕망의 세속이었다. 1945년 이후 지금까지 꼭 70년이 돼가는 한국 ‘잡지’의 역사는 한국의 정치사와 정신사, 사상사, 문화사를 오롯히 담고 있다. 


이렇듯 한국 현대 문화사를 해방 이후 지금까지의 잡지를 통해 봤다. 1945년부터 2014년까지 잡지의 역사를 123편의 ‘발간사’로 좁혀 뽑았고, 그것을 꿰는 해설과 논평을 붙였다. 성균관대 국문과 천정환 교수가 최근 펴낸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마음산책)이다. 잡지의 역사와 발간사를 1945~1949년을 시작으로 이후로는 10년단위로 끊어 2000년대까지 엮었다. 


1945년 해방의 격정은 그해 창간된 잡지의 발간사로 고스란히 담겨졌다. 월간지 ‘백민’은 “지난 반세긔 동안 우리는 횡폭한 검열의 제재로 맘 놓고 잡지 편집을 할 수 없었으며 찍기우고 깎기워서 병신만을 내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놈들은 이 땅에서 지배권을 잃고 떼거지로 몰여갔읍니다. 맘 놓고 쓰시요 자유의 노래를 불으시요. (…) 문화에 굼주린 독자들여 맘것 배블리 잡수시요”라고 외쳤다. 같은 1945년 12월 창간된 ‘민성’은 김구를 표지모델로 내세우고 “삼천만 동포들”을 향해 “동양의 아침은 마침내 밝아왓다”며 “우리의 위대한 조국을 완전한 독립국으로 건설하는 이 역사적 사업”을 위해 “신생 조선 백성의 부르짓음을 듯고(듣고) 쓰고, 때로는 이 민중의 심혼을 불러이르키고, 때로는 칼로 살을 벼이는 듯 아픈 충언도 사양치 않으며” “우리 민족의 공명정대한 여론의 공기가 되고 우리 민족의 활로를 가르치는 지남이 되려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해방 후 자유의 환희는 오래 가지 못했고, 좌우 갈등과 미ㆍ소대결, 미군신탁통치로 수많은 잡지와 신문의 검열과 정간 사태가 이어졌다. 이데올로기로부터 문학계도 자유로울 수 없어 문예지 ‘문학’은 좌파 문학인의 거점이 됐고, ‘문예’는 우익 문학인들이 깃발이 됐다. 이 가운데에서 소년 및 청년학생을 대상으로 한 창간된 ‘진학’은 미군정 간부의 축사와 좌파문학인 임화의 학생운동론이 공존했던 독특한 교육잡지였으며, 발간사에서 “희망은 크고 이상은 높다. 젊은이여 이러나자!”고 고했다. 여학생을 독자로 한 ‘여학생’도 있었고 ‘부인’ ‘새살림’ ‘신여원’ ‘여성문화’ 등 여성지도 이미 이때 다수 창간됐다. 


1950년대는 잡지의 첫 전성기였다. 그 절정엔 현대 한국 지성사에서 가장 중요한 잡지의 하나인 ‘사상계’가 있었다. 1952년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였던 ‘사상’이 전신인 ‘사상계’는 1953년 장준하가 창간했다. 저자 천정환은 “‘사상계’는 1950년대의 잡지이자 4ㆍ19 혁명의 미디어, 그리고 1960년대의 잡지였다”며 “1950~60년대 한국의 ‘거의 모든 것’을 담고 있어 이 시대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ㆍ기본 자료”라고 했다. 17년간 이어졌던 ‘사상계’는 박정희 정권에 대항했던 두 걸출한 반독재 투사인 장준하와 함석헌이 ‘투톱’을 이루고 사상과 문학, 지식의 공론장을 펼쳤지만 근본적으로는 반공주의와 자유민주주의, 기독교에 기반을 둔 잡지였다. 이를 주도한 장준하, 함석헌, 김준엽, 안병욱, 김형석, 양호민, 신상초 선우휘, 이범선 등이 모두 월남한 반공주의자였으며 그 중 다수가 기독교 신자였다. 이 시기의 시사잡지인 ‘신세계’도 이승만식 정치에 반대하며 정당정치와 대의제 민주주의의 문제를 다뤘다. 신익희, 조병옥, 장면, 곽상훈, 백남훈, 김동명 등 민주당의 핵심 정치인이 창간 좌담회에 등장했고, 젊은 김대중이 한때 주간역할을 맡기도 했다.

50년대에는 이같은 정론 종합지부터 ‘학원’ ‘학생계’ 등의 학생지 ‘여성계’ ‘여원’ 등의 여성지, ‘아리랑’ ‘명랑’ 등의 대중지, ‘새벗’ ‘소년세계’ 등의 소년지까지 다양하게 분화됐고, 출판계의 호황 속에 독자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때였다. 


재미있는 것은 1957년 창간된 통속잡지 ‘야담과 실화’다. 현대 도시의 기담ㆍ괴담, 연예계의 가십, 성과 관련된 뉴스나 실화, 이슈를 다뤄 후일 ‘선데이서울’과 함께 통속 대중지의 상징이 된다. ‘서울 처녀 60퍼센트는 이미 상실?’ ‘경이-한국판 킨세이 여성보고서’ 등의 기사로 이승만 정권에 의해 폐간조치됐고, 1960년에 다시 복간됐으나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1980년 다시 폐간됐다. 1992년에도 전라여인 사진과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 만화로 발행인이 구속되기도 했다. “야담이 풍겨주는 그윽한 고전적인 향기” “희로애락 이모저모의 실화에서 느끼는 ‘스릴’” 등의 문구가 들어간 발간사도 흥미롭다. ‘선데이서울’은 1968년 창간돼 23년 동안 대중 오락지의 대명사가 됐다.

1963년 창간된 종합지 ‘세대’는 비록 5ㆍ16 군사쿠데타로 종결됐지만 4.19 혁명으로 열어젖힌 1960년대 ‘새 세대’의 분위기를 제호에서부터 반영했다. 1960년대 잡지계의 주요한 변화는 ‘주간한국’ ‘주간중앙’ ‘선데이서울’을 비롯한 주간지의 주류화와 계간지, 그중에서도 명문가의 자손이자 미국 아이비리그 학벌을 가진 28살의 서울대 강사 백낙청과 그가 창간한 ‘창작과 비평’의 등장이다.

이후 1960년대의 잡지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글씨를 제호로 한 ‘샘터’와 한글 중심주의, 민중주의, 생태주의의 정신으로 만들어진 선구적인 잡지 ‘뿌리깊은 나무’의 대조적인 양상으로 상징된다. 이 시기에는 월탄 박종화가 창간사를 쓴 소년잡지 ‘새소년’이 첫 선을 보이며 ‘어깨동무’ ‘소년중앙’ 등으로 이어지는 소년잡지 전성시대를 열었다. 1982년엔 처음부터 끝까지 만화로만 채운 새로운 어린이잡지가 출범했는데, 지금 3040세대들에게는 어린 시절 ‘충격’으로 받아들였던 ‘보물섬’이다. 재미있는 것은 보물섬의 창간호 창간사의 주인공이다. “‘보물섬’은 또 하나의 ‘알찬 봉사’”라는 제목의 글에는 아무 직책이나 소속 없이 그냥 ‘박근혜’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은 사회변혁이론과 이념투쟁, 민족문학, 민중문학, 노동문학 같은 담론이 잡지의 주류 담론이던 1980년대, 사회과학의 영토를 대중문화와 페미니즘이 점령했던 1990년대, 그리고 인터넷 시대를 맞은 2000년대까지의 잡지사와 발간사들을 아울렀다.

/suk@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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