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현지시간) OPEC 총회에서 감산 합의가 무산되면서 런던 ICE 선물시장에서 1월 인도분 브렌트유는 전날보다 5.17달러(6.6%) 내린 72.58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지난 6월에 비해 34%나 떨어진 것이다. 추수감사절 연휴로 뉴욕상업거래소(NYMEX)가 문을 닫은 가운데, 전자거래에서 서부 텍사스산중질유(WTI)는 4.64달러(6.3%) 떨어져 69.05달러가 됐다.
2010년 5월 이후 4년6개월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OPEC이 내년 초까지 감산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할 경우 최악의 경우 배럴당 35달러선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감산불발 쇼크로 달러화에 대한 러시아 루블화의 가치가 사상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것을 비롯, 산유국 통화가치와 금 값이 동반약세를 기록하는 등 글로벌 금융시장도 요동쳤다.
OPEC의 이번 합의는 무엇보다 낮은 유가를 일정기간 유지해 미국산 셰일오일과의 가격경쟁력 격차를 벌리는 동시에 시장지배력 우위를 이어가겠다는 석유 부국 사우디가 주도한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검은 황금(원유)’을 둘러싼 전쟁에는 시장원리 뿐 아니라, 원유를 정치적 무기화하는 열강들의 얽히고 설킨 파워게임이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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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불패’ 사우디아라비아=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1, 2차 석유전쟁에 이어 이번 3차 전쟁에서도 불멸의 승전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사우디는 저가 원유 전략으로 미국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원유값 하락을 유도하며 셰일유(油) 개발로 국제 에너지 시장의 적수로 등장한 미국을 고사시키고 시장 점유율을 유지해 주도권을 확실히 쥐겠다는 심산이다.
미국의 셰일유는 생산비용이 일반 원유보다 높기 때문에 가격이 떨어지면 채산성을 확보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워진다.
미국 업체들은 셰일유의 손익분기점이 53달러까지 떨어졌다고 주장하지만 80달러는 돼야 수지를 맞출 수 있을 것으로 분석된다.
반면, 사우디와 아랍에리미트, 쿠웨이트 등 거대 유전의 생산비용은 5~25달러 수준이다. 게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사우디는 미국에 수출하는 원유가격을 배럴당 45~50센트 낮추면서 승기를 확실히 잡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물론 원유값이 떨어지면 사우디의 수익도 줄어든다. 하지만 사우디는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전망하고 있다.
2000년만 하더라도 정부 부채가 국내총생산(GDP)의 120%에 달했지만 고유가 시대를 거치면서 GDP 대비 2% 수준까지 떨어진 것이 자신감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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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도의 연출자(?)’ 미국= 사우디를 바라보는 미국의 속내는 복잡하다. 저가 원유 전략 탓에 자국 석유업계가 어려움에 처했다.
유가 하락세가 뚜렷해지자 영국·네덜란드의 로열더치셸과 미국의 셰브론 등은 북미의 셰일유전 지분을 일부 매각하려는 움직임까지 포착되고 있다.
셰일 석유와 가스를 본격적으로 개발하면서 에너지 수출국으로 전환하려는 미국이 사우디에 제대로 한 방 먹은 모습이다.
하지만 이번 석유전쟁의 연출자가 미국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신냉전으로 불릴 만큼 국제사회에 위협이 되고 있는 러시아와 적대국인 이란과 베네수엘라, 그리고 이슬람국가(IS)의 석유판로를 막아 미국의 요구에 굴복시키겠다는 전략이 숨어있다는 얘기다.
미국의 에너지 전문가 마이클 클레어 뉴햄프셔대 교수는 톰 디스패치에 “오바마의 새로운 석유전쟁: 이슬람국가, 이란, 러시아 정조준”이라는 글을 싣고 “오바마 정부가 석유를 핵무기보다 더 유용한 무기로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고 썼다.
그러나 저유가가 러시아와 이란의 숨통만 조여주면 좋겠지만 지금은 미국 자신에게도 ‘치킨게임’ 양상의 칼끝이 겨눠져 있어 안심할 상황은 아니다.
여기에 궁지에 몰린 러시아가 중국과 손을 잡게 될 경우, G2로 성장한 중국에 힘이 더 실리게 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점도 부담이다. 이미 러시아는 중국에 러브콜을 보내 최근 서부노선 가스공급에 합의했다.
▶‘사면초가’ 러시아=사우디가 원유값을 낮추자 러시아는 직격탄을 맞았다. 서방으로부터 경제 제재를 당하고 있는 러시아는 원유가 사실상 유일한 수입원이다. 러시아의 수출에서 석유와 천연가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68%에 달한다.
러시아는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는 넘어야 ‘적자살림’을 피할 수 있을 것으로 조사됐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서방 제재로 국내총생산(GDP)의 2%에 해당하는 연간 400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하고 있고 기름값이 떨어지면서 1000억달러 정도의 수입이 줄었다”고 털어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파멸적인 유가하락”이라며 평가한 이유다.
러시아 루블화 가치도 지난 3개월간 30% 이상 폭락했다. 이날도 감산 불발 쇼크로 미국 달러에 대한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3.6% 하락해 사상최저인 48.66까지 주저앉았다.
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푸어스는 러시아의 신용등급을 투자수준으로는 가장 낮은 BBB마이너스를 유지하면서 신용전망을 부정적이라고 밝혀 강등 가능성을 예고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러시아는 OPEC 회원국이 아니면서도 OPEC 총회가 열리는 오스트리아 빈으로 국영석유회사 대표를 파견해 감산을 촉구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러시아 신문 ‘프라우다’는 “오바마와 사우디가 러시아 경제를 파괴하기를 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어부지리’ 중국ㆍ유럽=중국과 유럽은 ‘반사익’에 표정관리 중이다. ‘에너지 블랙홀’ 중국은 국제유가 폭락을 석유 비축의 적기로 판단하고 석유를 대량 매입하고 있다.
중국 최대 국영 석유회사인 중국석유천연가스집단공사(CNPC)는 10월 들어 자회사를 통해 싱가포르 원유시장에서 카고(1카고당 50만배럴) 36개 분량, 1800만배럴의 원유를 사들였다. 월 단위 기준 최대 구매량이다.
중국은 국제유가가 1달러 하락할 때마다 21억달러의 구매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유럽도 유가하락을 반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28일 “유가하락이 ‘유럽주식회사’에 한줄기 빛이 되고 있다”며 “저유가는 유럽에 에너지 비용을 낮추고 소비자들의 구매력을 끌어올려 수요증가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스위스 금융기업 UBS는 “유가가 15달러 하락하면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1년 후 0.25%포인트 끌어올릴 수 있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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