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경제
“왜 우리가 감산하느냐”…사우디 ‘치킨게임’ 점입가경
뉴스종합| 2014-12-11 11:42
[헤럴드경제=천예선ㆍ강승연 기자]원유가격이 바닥없이 추락하고 있다. 미국 서부텍사스중질유(WTI)는 하루새 4.5% 폭락, 배럴당 60.94달러까지 밀렸다. 6개월새 43% 떨어졌다.

유가급락은 러시아ㆍ이란 등 산유국과 미국 석유메이저에는 악재지만 소비지출 확대 등 긍정적인 면을 가진 ‘양날의 칼’이지만 최근 단기 급락세에 놀란 글로벌 금융시장은 요동쳤다.

10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WTI는 글로벌 경기 부진에 따른 내년 수요 감소 전망에다,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의 감산 부인 발언이 겹치며 5년 5개월만에 최저점으로 하락했다. 런던 ICE 선물시장의 브렌트유는 3.81% 떨어진 배럴당 64.29달러 선에 거래됐다.

이날 원유시장은 수요와 재고, 공급 측면에서 동시에 큼직한 악재를 만났다.

게티이미지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이날 월례 보고서에서 내년 원유 수요 전망을 낮췄다. OPEC은 2015년 전 세계 원유 수요가 올해의 하루 2940만 배럴보다 적은 하루평균 2892만 배럴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12년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은 지난주 미국의 원유 재고량이 145만 배럴 늘어 3억8079만 배럴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220만 배럴이 떨어질 것으로 봤던 시장의 예측은 빗나갔다.

유가가 6개월새 40% 이상 급락하자, 시장에서는 OPEC이 내년 6월 정례회동 이전인 내년초께 특별 회동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유가 급락세를 저지할 최후의 보루로 여겨졌던 OPEC의 감산 기대감은 사우디 장관의 발언이 전해지며 실망감으로 돌변했다.

OPEC의 감산 합의 불발을 이끌며 3차 오일전쟁을 촉발한 사우디아라비아의 알리 알-나이미 석유장관은 이날 유가급락에 따른 감산 필요성을 묻는 질문에 “모든 원자재 가격은 시장 논리에 따라 오르고 내리기 마련이다. 왜 우리가 감산을 해야 하는가”라고 감산 가능성을 일축했다.

로이터통신은 이에 대해 사우디가 그동안 견지해온 ‘스윙 프로듀서(swing producer: 생산량을 조정해 수급을 원활하게 하는 당사자)’ 역할을 포기할 것임을 내비친 것으로 분석했다.

최대 산유국으로 OPEC를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사우디의 감산 부인으로 유가는 당분간 추가하락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OPEC이 더 이상 존재 의미가 없으며, 원유 가격이 배럴당 50달러까지 하락할 것으로 내다봤다.

게티이미지


BOA는 WTI 가격이 55달러 아래로 떨어지면 미 셰일가스 생산업체 중 절반이상의 경영이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BOA는 “원유 가격의 가격 하락은 세계경제에 1조 달러에 상당하는 자극제가 될 것이며, 이는 2015년 7300억 달러의 감세 효과와 맞먹는다”고 밝혔다.

모건스탠리는 내년 브렌트유 가격을 기존 전망치 98달러에서 70달러로 하향조정하고, 43달러까지 떨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사우디, 석유 무기화 셈법은?=국제유가가 5년 5개월래 최저점으로 하락하며 배럴당 60달러까지 밀리자 글로벌 석유시장을 둘러싼 지정학적 위기감이 한층 고조되고 있다. 사우디가 “왜 우리가 감산하느냐”며 추가 공세에 나서면서 이번 치킨게임에서 미국 셰일기업들이 수세에 몰리는 양상이다. 

사우디는 유가하락이 시장원리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기저에는 ‘석유의 정치 무기화’라는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10일자 칼럼에서 “사우디는 원유수출로 얻은 오일머니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단 한번도 포기한 적 없다”며 사우디에 “석유는 주요 외교적 무기”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이란을 정조준하고 있다”고 지목했다.

사우디가 중동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시아파 맹주인 이란을 저유가로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WTI 가격 추이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이란이 재정수지 균형을 위해 필요한 유가는 현재의 두배 이상인 배럴당 130.70달러다. 

이란은 핵개발 문제를 놓고 미국과 유럽의 제재를 받고 있어 저유가는 경제를 초토화할 수 있는 ‘시한폭탄’인 셈이다. 여기에 시리아와 이라크에 있는 지지세력에 매달 15억달러를 지원하고 있어 재정형편은 더 어려운 상황이다.

코너에 몰린 이란의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10일 내각 회의에서 “유가 하락은 단지 경제적 문제가 아니고 특정 국가가 정치적으로 계산한 음모”라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란 국영 프레스TV는 “사우디가 유가하락에 동참한 까닭은 러시아, 이란, 베네수엘라에 해를 입히려는 미국의 시나리오 일부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라고 해설했다.

그러나 급격한 유가하락은 사우디에게도 무리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로이터통신은 사우디의 내년 정부 예산이 유가하락으로 축소로 돌아설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우디는 원유 수출이 국가 경제의 78%를 차지하고 있고 지난해 원유 수출액은 2900억달러에 달했다.

경제타격은 이미 가시화됐다. 사우디 주가지수인 타다울지수(TASI)는 8000대로 지난 9월 연고점(1만1149)에서 20%이상 하락한 상태다.

일부 전문가들은 “사우디가 경상수지 적자를 보지 않는 유가 수준은 배럴당 65달러 정도”라면서 “유가가 65∼75달러 이하로 떨어질 경우 사우디도 힘들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저유가에 따른 사회혼란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저유가가 장기화하면, 소수의 왕족이 지배하는 사우디 정부가 ‘퍼주기식’ 국민 보조금을 전면 재검토할 수 있다”며 이렇게 되면 “사회 동요의 위험이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사우디 동부 유전지대에서는 시아파 신도가 많아 수니파 왕족에게 반발하는 움직임이 포착되기도 했다.

▶미국 셰일메이저, 고사위기=미국에 있어 저유가는 ‘양날의 칼’이다. 외교적 차원에서 유가하락은 신냉전을 방불케 할 만큼 국제사회에 위협이 되고 있는 러시아와 적대국인 이란과 베네수엘라, 이슬람국가(IS)의 석유수익을 막아 미국의 요구에 굴복시키는 ‘꽃놀이패’로 작용할 수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자동차 사회’이기 때문에 저유가가 휘발유 가격 하락으로 이어져 일종의 ‘감세효과’를 볼 수 있다.

전국 평균 휘발유 가격은 2.77달러로 전년대비 50센트 하락했다. 휘발유가 1센트 하락할 때마다 미국 소비자는 약 14억달러를 에너지 이외의 분야에 지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말 쇼대 쇼핑시즌을 맞아 미국의 소비진작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미국 에너지기업은 저유가에 직격탄을 맞았다. FT는 “국제 유가가 배럴당 70달러 선을 유지한다면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12% 이상이 채산성이 맞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지난 6개월간 40%나 폭락한 국제 유가는 생산 원가가 싼 산유국이나  업체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른바 적자생존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0일 유가가 배럴당 60달러를 위협하자 미국 에너지 회사 주가가 줄줄이 하락했다. 노스다코타 셰일 유전지대의 최대 개발업체인 컨티넨탈리소스는 4.8%, 펜 버지니아 6.2%, 와이팅 페트롤리움 5.8% 각각 떨어졌다.

뿐만 아니라 유가하락은 미국의 금리인상에도 복병이 되고 있다. 시장에서는 11월 고용통계가 크게 개선되면서 16~17일(현지시간) 열리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금리인상 신호가 나올 것이라는 견해와 유가급락으로 금리인상을 연기할 것이라는 관측이 맞서고 있다. 

이번 FOMC회의 최대 관전포인트는 성명에서 ‘상당기간’ 초저금리 유지 문구를 수정할 것인가 여부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유럽과 일본에 디플레이션 공포가 강해질 경우 미국이 ‘단독성장’을 이어가기는 힘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유럽중앙은행(ECB)과 일본은행(BOJ)이 저유가발(發) 디플레 심화를 우려하고 있는 상황에서 달러 강세는 미국 수출 시장에 적신호가 될 수 있다고 신문은 전했다.

/sparkling@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