뚝딱뚝딱 뒷담화
[취재X파일] 홍보대행사? 안에선 을, 밖에선 ‘넘사벽’
부동산| 2015-01-11 10:28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안이 전쟁이면 밖은 지옥이야.” 인기 드라마 미생의 유명한 대사입니다.

그런데 드라마 미생의 한 장면처럼 언론업계에서 은퇴한 한 기자 선배를 며칠 전 우연히 만났습니다. 언론계를 떠나 홍보대행업체 대표로 새 생활을 시작한 그 선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홍보대행사? 안에선 을, 밖에선 넘사벽이더라.”

넘사벽이란 인터넷에서 흔히 쓰이는 신조어로 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대상이라는 의미입니다.

기자와 홍보대행사 직원은 흔히 말하는 갑을관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자를 통해 자신의 업무를 이뤄야 하는 홍보대행사 직원으로서는 가급적 기자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고 홍보대행사 직원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 입장인 기자는 소위 ‘갑질’을 합니다.

<사진설명>현장에서 취재 지원하는 건설사 홍보팀 직원

그 선배는 현직에 있을 때 모 홍보대행사 대표의 부탁을 가끔 들어주는 갑이었습니다. 그가 현직을 떠나 홍보대행사를 차리고 나자 자신이 가끔 ‘도와주던’ 그 홍보대행사 대표가 을이 아니라 ‘넘사벽’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내가 가끔 도와줬었거든. 그런데 나와 보니 넘사벽이데.”

그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에는 잘 몰랐는데 사회에 나와 보니까 그래도 기자들이 순수한 축에 들더라.”

“그런데 기자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성격이 좀 이상해지는 거 같아. 항상 의심을 많이 하게 되고, 그래서 별로 안 좋은 거 같아.”

현직을 떠난 선배와 나누는 대화를 통해 마치 미지의 세계를 넘나드는 듯한 스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배가 이야기하는 현실은 정말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홍보대행사는 자기 업체나 자기 제품의 홍보를 원하는 일명 ‘클라이언트’들의 요구에 맞춰 업체나 제품의 홍보를 대행하는 회사입니다. 국내 건설사들 대부분이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국내 부동산 경기의 극심한 침체로 자체 홍보팀 규모를 축소하거나 없애고 홍보대행사에 홍보팀 업무를 맡기면서 부동산 업계에서만은 홍보대행사의 대목, 특수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부동산 업계에서 홍보대행사를 통하는 홍보 시스템은 크게 활성화돼 있지 않아 홍보대행사의 활동도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현재까지 상당 기간 동안 부동산 침체기가 이어지고 건설사의 경영난도 악화되면서 부동산 업계 홍보대행사 시장은 오히려 수백억원대로 추정될 정도로 커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마침 지난해는 아파트 분양 물량이 26만여 가구로 2000년대 들어 최대 물량을 기록했습니다. 홍보대행사들은 지난해 최대의 대목을 맞이했습니다. 부동산 홍보대행업계에서 “올해 못 먹으면 바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올해, 지난해보다 더 많은 27만여 가구의 아파트 분양 물량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올해 부동산 홍보대행업계에서는 “이번에 못 먹으면 바보천치”라는 말이 나오겠지요.

이번 기회를 노렸는지 아닌지, 요즘 들어 홍보대행사를 새로 차리거나 직원을 더 많이 뽑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홍보대행사를 창업한 그 선배는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이었습니다. “워낙 분양 물량이 많으니 잘 될 수도 있을 것 같더라. 그런데 실제로 부딪혀 보니 쉽지는 않네.”

지금 그의 눈에는 조직과 시스템을 갖추고 수 년간 업계를 다져 온 기존 홍보대행사의 위용이 전과 달리 훨씬 거창해 보인다고 합니다. “과연 직원 월급을 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 홍보대행사를 보면 넘사벽인 거지”라며 그는 웃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갑이 을이 되고, 을이 ‘넘사벽’이 되기도 합니다.

아메리카노 한 잔으로 그 선배를 떠나보내며 제 머리 속에는 문득 드라마 미생의 익숙한 대사가 천천히 한 글자씩 떠올랐습니다.

“안이 전쟁이면 밖은 지옥이야.”

두 시간에 가까운 대화를 통해 그 선배가 무언으로 남긴 메시지였습니다.

soo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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