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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고 뜯겨야 했던 숙명?…전ㆍ현 정권의 피할 수 없는 갈등사
뉴스종합| 2015-02-01 11:13
[헤럴드경제]이명박 전 대통령(MB)의 회고록인 ‘대통령의 시간’을 놓고 박근혜 정부와 이명박 정부가 으르렁거리고 있다. 이를 계기로 숙명처럼 반복돼 온 현재 권력과 과거 권력 간 뿌리 깊은 갈등의 역사가 재삼 주목받고 있다.

1987년 개헌 이후 5년 단임 대통령제가 정착되면서 ‘살아 있는’ 권력은 전임 정부와의 차별화를 통해 신구(新舊) 권력간 갈등을 드러냈다. 게다가 현재 권력과 미래 권력의 파워게임은 차기 정부로까지 이어져 전ㆍ현 권력간 갈등을 양산했다.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다 했던가. 우정으로 똘똘 뭉친 오랜 친구도,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왕년의 민주화 동지끼리도, 정치를 가르치고 배운 사제관계도 ‘정권의 이름’으로 반목하고 갈등하는 ‘숙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사진=헤럴드경제DB]

▶MB vs 박근혜…9년 갈등의 역사=“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18대 총선 당시 ’공천학살’을 두고 박 대통령이 한 말이다. 박 대통령의 어록은 MB와 박 대통령측간 뿌리깊은 9년 갈등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MB 회고록을 둘러싼 전ㆍ현 정권의 갈등은 2007년 대선 경선 당시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 대통령과 이 전 대통령은 숙명의 라이벌이었고,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은 여권을 지탱하는 두 축이었다. 그렇기에 서로에 대한 깊은 갈등은 여권 권력지형도를 그려내는 공식이기도 했다.

먼저 기선 제압에 성공한 쪽은 MB를 중심으로 한 친이 진영이었다. 2008년 MB 정부 출범 이후 치뤄진 18대 총선 공천에서 친이계가 당을 장악했다. 정치권에선 ‘공천학살’이란 말도 나왔다. 상대적으로 소수인 친박 진영은 끈끈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친이계에 저항했다.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는 박 대통령의 ‘어록’도 이때 나왔다.

2010년 세종시 수정안 부결 사태는 MB와 박 대통령간 갈등을 정점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이 전 대통령은 세종시 수정안 추진을 위해 2009년 9월 충청 출신인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미래권력(박 대통령)에 대한 일종의 견제 카드였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노련했다. 당시 친박계는 ‘국민과의 약속’을 외치며 원안을 고수했고, 박 대통령은 2010년 6월 국회에서 직접 수정안 반대토론에 나서 부결을 이끌어냈다. 이 일은 국민들에게 ‘박근혜=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주입시킨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박 대통령이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양측의 갈등은 신ㆍ구 권력간 충돌로 발전했다. 박 대통령은 퇴임을 앞둔 이 전 대통령이 최시중 전 방통위원장 등 측근의 특별사면을 추진하자 비판의 목소리를 서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인수위원회도 “모든 책임은 이 대통령이 져야 할 것”이라며 이 전 대통령을 향해 집중 포화를 날렸다.

▶”나를 밟고 지나가라“…끊임없이 이어지는 전ㆍ현 정권 갈등사=전두환 노태우 정권의 관계는 애증ㆍ견제ㆍ충돌로 버무려진 역사다.

1987년 당시 전 전 대통령은 후계자이자 친구인 노 후보에게 “나를 밟고 지나가라” 말하며 정권재창출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이 ‘5공 청산’으로 답하자 이 둘은 애증의 관계로 전락한다. 전 전 대통령은 결국 대국민 사과 성명과 함께 백담사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호랑이굴’로 들어갔던 김영삼 전 대통령도 1993년 문민정부 출범과 동시에 전임 정권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하나회 숙청을 시작으로 5ㆍ18특별법 제정 등 ‘역사 바로세우기’ 작업을 통해 전임 대통령인 노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전 전 대통령까지 법정에 세웠다. 이 과정에서 전 전 대통령은 “나에 대한 수사는 정치보복”이라는 내용의 골목성명을 발표하는 등 강력히 반발했다.

헌정사상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김대중(DJ) 정부도 신ㆍ구권력간 갈등을 피해갈 수 없었다. 김대중 정부는 1997년 외환위기 책임 규명을 위한 경제 청문회를 진행하면서 민주화 동지이자 필생의 라이벌이었던 김영삼(YS)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었다.

이 과정에서 문민정부 경제라인이 대거 기소됐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청문회 증인 채택에 반발하며 출석을 거부했다. 후일 김 전 대통령은 “청문회에 나오라는데 나를 모욕주려는 자리에 왜 나갔겠는가”라며 한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신구 정권의 갈등이라는 깊은 골을 빠져나오기에는 같은 뿌리라는 소속감도 무용지물이었다. 김대중 노무현의 진보정권도 여야 관계 못지않은 갈등을 빚었다.

2003년 출범한 노 전 대통령은 출범 직후 대북송금 특검을 수용하며 전 정권과의 갈등에 불을 지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 전 대통령의 최대 업적인 남북정상회담 의미는 퇴색됐다. 또 박지원, 임동원 등 김 전 대통령 핵심 측근들마저 줄줄이 구속됐다.

특히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분당 사태에 이어 열린우리당이 창당하면서 양측의 갈등은 정점에 달했고, 이때 부터 형성된 친노-비노간 대립구도는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에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진보정권을 누르고 정권교체를 이룬 이명박 전 대통령도 다르지 않다. 그는 대선 직후 “전임자를 잘 모시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이명박 정부는 김해 봉하마을에 있는 대통령 기록물 반환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를 두고 청와대는 “절도죄”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노 전 대통령은 “궁색한 내 처지가 실감나지 않는다. 이 대통령을 오해해도 크게 오해한 것 같다”는 편지를 이 대통령 앞으로 보냈다.

양측의 갈등이 고조되던 중 박연차 게이트가 터졌다.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 수사대상에 올랐고, 이는 검찰수사 도중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는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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