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경제
[피플&스토리] 식품업계의 ‘얼리 어댑터’ 박진선 샘표 사장의 삶
뉴스종합| 2015-03-06 07:39
-맛에 대한 혁신 내지 재해석에 몰두하는 인생
-“한국 전통음식,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R&D에 주력”
-“무조건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신제품 개발에 매진”
-R&D 투자 강조…전에 없던 신제품 개발 만이 살길
-연두 100점, 백일된장 80점 정도는 된다 자부
-연두 매출, 10년 내 ‘전세계 1조원’ 목표
-‘샘표=간장회사’ 낡은 이미지 탈피는 과제
-연두 매출 3배 오르면, ‘샘표=연두’ 후광효과 기대


[헤럴드경제=장연주 기자]“다시다처럼 쓸 수 있는 걸 만들 수 있겠는데, 해볼까요?”

지난 2008년 초, 최용호 샘표 발효기술연구중심 연구부장이 박진선(65) 샘표식품 사장을 찾아왔다. 박 사장은 무심코 그러라고 했다. 1년 뒤인 2009년, 최 부장은 “다 됐다”고 했다.

“뭘?”

박 사장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을 테스트 해보고 “이게 장난이 아니구나. 세상에 없던 게 나왔구나”하는 직감이 들었다. ‘요리 에센스’ 연두의 탄생 스토리다.

“다시다를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수준이 다른 제품이 나왔죠. 마케팅팀에서 처음에 ‘4세대 조미료’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난 조미료란 말을 빼자고 했는데, 이미 프로모션 계획도 다 짜놓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냥 조미료로 출시됐죠.”

결과는 ‘대실패’였다. 2010년 5월 ‘4세대 조미료’라는 타이틀로 출시된 연두는 거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2년이 지나면서 마케팅 및 컨설팅 담당자들의 생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홍보팀 직원이 ‘에센스’라는 말을 꺼냈다. ‘화장품 냄새가 나는 이름’이라며 반대하는 의견도 많았다. 2012년 5월 연두는 ‘요리 에센스’로 재탄생했다.

연두는 출시 첫해 16억원의 매출을 올렸지만, 재탄생한 2012년에는 43억원으로 뛰었고, 2013년과 2014년에는 각각 147억원, 171억원으로 급성장하고 있다. 내년에 창립 70주년을 맞는 샘표식품은 연두를 발판으로 ‘제2의 도약’을 노리고 있다.

경영인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철학자가 됐을 수도 있었을 사람, 식품업계의 얼리 어댑터(early adopter)로 소문난 사람. 그런 박 사장을 최근 서울 충무로에 위치한 샘표식품 본사에서 만났다.

▶”간장장사, 생각 없었다”는 사람=박 사장은 3세 오너 경영인이다. 할아버지인 고(故) 박규회 회장과 아버지인 2대 박승복 회장의 뒤를 이어 1997년 샘표식품 사장에 취임했다. 박 사장은 20년 가까이 샘표식품을 진두지휘하고 있다. 하지만 ‘샘표=간장회사’란 인식은 여전하다. 이 고착된 이미지를 깰 해법으로 그는 ‘맛에 대한 혁신 내지 재해석’ 연구에몰두 중이다.

박 사장은 소위 잘나가는 ‘경기고, 서울대’ 출신이다. 처음에는 가업을 승계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었죠.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으니까. 처음부터 가업을 이어나가겠다는 생각은 전혀 안했어요. ‘간장장사를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하하하.”

하지만 막상 대학에 가니 공부가 재미 없었다. 수학과 물리를 이론만 배우니 흥미를 느끼기 어려웠다. 박 사장은 대학 졸업 후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전자공학 석사과정을 마쳤고, 1988년에는 오하이오주립대 철학박사 학위를 땄다. 식품과는 전혀 관계없는 전자공학에 이어 철학까지 전공한 이유가 궁금했다.

“철학은 생각을 깊이있게, 논리있게 하는 훈련을 할 수 있게 합니다. 다루는 주제는 경영과 관련이 없지만, 생각하는 훈련은 회사경영은 물론 살아가는데 엄청나게 도움이 되고 있지요.”

박 사장은 3세 오너 경영인으로, ‘가업 승계=유산 상속’이라는 세간의 시선이 불편하다고 했다.

“아버님과 작은 아버님, 두 분이 회사를 경영하셨는데 제가 미국에 갔던 1970년대 중ㆍ후반은 지금의 한국과 비슷했죠. 마케팅이 굉장히 활발하기 이뤄지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회사를 보면 마케팅 개념이 전혀 없더라구요. 세상이 바뀔 것은 뻔한데 두 분이 연세가 많으셔서, 이대로 하면 회사 존재 자체가 없어질 것 같았어요.”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대졸공채 등 샘표에 시스템을 도입하다=박 사장은 할아버지가 자신을 엄청 예뻐하셔서, 할아버지가 만든 회사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회사 경영에 나서게 됐다고 했다. 공부 잘하는 유복한 집안 자제였던 박 사장은 처음에는 10년이면 회사를 다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20년은 더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는 사장이 되고 나서 가장 잘한 일을 묻자 대졸공채를 시작한 것을 꼽았다.

“당시 직원이 200명 정도였는데, 90% 이상이 생산직이었죠. 영업사원도 없었고 거의 다 사무 보는 사람들이었어요. 뭘 하려고 해도 제대로 된 일을 할 수가 없더라구요. 간부도 없었고, 아이디어 창출도 못하고, 한마디로 시스템이 전무했죠.”

결국 그는 사장 취임 이듬해인 1998년 첫 대졸공채를 시작했다. 첫해 30명을 뽑았고, 이후에도 50~60명까지 꾸준히 뽑았다. 하지만 처음엔 6개월 안에 뽑힌 사람들이 거의 다 나갔다.

“윗 직급도 없고 일할 사람이 없으니까 자꾸만 나가더라구요. 아랫사람이 있으면 윗 사람이 없고, 그런 식으로 계속 뽑아도 나가다가 결국 정착이 됐죠.”

▶샘표의 비전, 스페인에서 교훈을 얻다=박 사장이 말하는 샘표의 비전은 ‘전통 한식의 맛을 업그레이드 해서 한국인과 세계인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냐고 묻자 곧바로 스페인 얘기를 꺼낸다.

“스페인의 ‘알리시아’와 함께 작업하면서 놀란 점이 참 많았습니다. 제가 별로 생각하지도 못하고 들어보지도 않은 일들을 하고 있어서 깜짝 놀랐죠.”

알리시아는 세계 최고의 셰프로 꼽히는 스페인의 스타 셰프 아드리아가 만든 세계 최초의 요리과학연구소다. 영양학자와 셰프는 물론, 요리학자들까지 함께 모여 연구하는 이색적인 공간이다.

“환자식이나 노인식의 경우, 한국에서는 나트륨을 많이 먹으면 안되니까 이걸 확 빼고 그냥 줍니다. 그러면 맛이 없죠. 하지만 알리시아에서는 환자들이나 노인들은 먹는데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이 사람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뭔가를 연구합니다. 충격적이었습니다. 우리랑 접근 방식이나 생각 자체가 완전히 다른거죠.”

박 사장은 알리시아 연구소 밖에 있는 몇천 평의 밭을 보고 또 한번 놀랐다고 했다. 4~5평 짜리 밭이 쭉 늘어서 있는데, 물어보니 밭마다 각기 다른 작물이 심어져 있었다.

“뭐 하는 곳이냐니까 스페인의 없어져 가는 전통작물을 다 모아 놓았다고 하더라구요. 사람들이 안 먹으니까 없어지고 있는데, 이걸 가지고 맛있게 먹는 방법을 개발한다는 거에요. 맛있어야 사람들이 먹을 테니까. 결국 먹는 것은 맛과 건강이 중요합니다. ‘맛있게 먹는’ 조리법을 개발한다는 점이 우리와 참 다른 것 같아요.”

▶연구개발(R&D)만이 살 길…“연두 100점, 백일된장 80점”=박 사장은 유독 R&D에 심혈을 기울인다. 샘표의 연구개발비는 지난해 기준 매출의 5% 수준인 100억~150억원이다.

“사람들이 R&D를 왜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약 20~30년 전만 해도 그때는 공급이 모자란 때라 뭐든지 만들어 팔면 팔렸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공급과잉 시대여서 1등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죽지요. 가격경쟁을 해도 1등과는 상대가 안되기때문에, 이제껏 없던 것을 내놔야 합니다. 연두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여태까지 없는 제품이기 때문이죠.”

박 사장은 연두가 조미료 대체제 역할을 하긴 하지만, 전에 없던 조미료라고 자부한다. 사실 연두는 조선간장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한 ‘덤’이다. 간장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한 제품이라고 보면 된다.

샘표는 지난 2001년 세계 최초로 콩 만을 발효해 만든 전통 한식간장의 대량 생산화에 성공, 맑은 조선간장을 출시했다. 기존 양조간장이 콩과 소맥을 원료로 하는 방식이라면, 한식간장은 콩만을 발효해 만드는 신기술이 적용됐다. 샘표는 60년 넘게 축적해온 발효기술을 기반으로 콩 발효 기술을 더욱 업그레이드했고, 2009년 차원이 다른 콩발효액 연두 개발에 성공했다.

박 사장은 “지난 10년 간 투자를 많이 했는데, 이제 그 성과가 나기 시작했다”며 “연두는 거의 100점에 가까운 제품인 만큼, 전세계에서 1조원 이상 파는 대박상품으로 키우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연두를 10년 내 국내에서 1500억~2000억원, 나머지는 해외시장에서 팔겠다는 전략이다.

샘표가 지난 달 출시한 ‘백일된장’은 15년 만에 출시한 된장 신제품으로, 기존 된장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백일된장’은 기존 된장이 30일간 숙성하는 것과 달리, 합성첨가물 없이 콩과 천일염, 청정지역의 암반수 등을 사용해 100일간 발효 숙성시켰다.

“백일된장은 점수를 매기자면 80점 정도로 보는데, 100억원 정도는 팔 것 같아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연두 마케팅 전략입니다. 연두를 전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제품으로 만들기 위해, 품질 업그레이드와 함께 마케팅에 전력을 다할 생각입니다.”

박 사장은 연두를 지금의 3배 정도 팔면, ‘연두=샘표’의 후광효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는 10년 쯤 후에는 낡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샘표’라는 브랜드를 전면에 내세워도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내다봤다.

yeonjoo7@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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