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People&Story] ‘국민통합 구들장’ 불 지피는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
뉴스종합| 2015-03-27 11:52
[헤럴드경제]지난달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부인 故 박영옥 여사의 장례식은 한국현대사를 그린 한편의 다큐멘터리였다.

장례기간 내내 여야와 세대를 초월한 정치권 인사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과거를 복원하고 현재를 새롭게 조명하는 장면들이 끊임없이 연출된 탓이다.

특히 빈소를 찾은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회 위원장과 김 전 총리의 만남은 백미였다. 각각 민주화와 산업화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자 1997년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이뤄진 ‘DJP 연합’의 주역들이 2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만난다는 자체가 ‘스토리’인 동시에 ‘히스토리’였기 때문이다.

한 위원장은 대학시절 학생운동부터 시작해서 국회의원과 여당대표,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역임한 우리시대의 거인이다.

빌딩숲 사이로 청와대가 마주보이는 광화문 대통합위 위원장 집무실에서 한 위원장의 삶의 궤적과 철학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자리를 가졌다.

한 위원장은 국민 속에서, 국민과 함께 실천하는 대통합위를 표방하며 국민대통합이 형이상학적인 구호에 그치지 않도록 구체화하는 실천방안 마련에 주력하고 있었다.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은 한국현대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거인이자 암투병중인 부인 정영자 여사를 향한 애정이 지극한 로멘티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2년여간 대통합이라는 기차가 달리기 위한 레일을 깔았으며, 이젠 더디지만 한번 데워지면 오랫동안 식지 않는 구들장을 데우는 심정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대타협의 달인, 통합의 달인=지난 50여년 동안 현대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한 위원장에게는 ‘협상의 달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닌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노사정위원장으로서 노사정 대타협을 이끌어낸 것을 공인으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IMF가) 너희 나라가 부도날 수도 있는데 뭘 믿고 돈을 주겠느냐 그러면서 노사정 대타협, 노사가 안정될 때 조건부로 주겠다고 했죠”라고 설명했다.

그때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이었고 노사정위원회도 뚜렷한 권한이 없는 대통령 당선자 자문기구에 불과했다.

한 위원장은 “그래도 어떻게든 만들어야한다는 생각에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당과 정부, 재계, 노동계 대표들로 노사정위를 구성하고 부랴부랴 설득에 들어갔지. 2개월 정도 걸렸는데 마지막 발표 기자회견까지 2년도 더 걸린 것 같았어요. 결국 노사정 대타협을 이뤄냈는데 다들 국가를 위해 큰일을 했다. 감격스럽고…”라며 말끝을 잇지 못했다.

‘협상의 달인’이 말하는 협상의 스킬은 핵심과 진정성, 인내였다.

그는 먼저 문제의 핵심에 빨리 접근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다음으로는 역지사지의 자세로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진정성을 갖고 대화에 나서야한다고 했다. 또 상대가 미안해할 정도로, 나를 이해해줄 때까지 참고 또 참으면서 타협점을 찾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 위원장은 3월말을 시한으로 노동시장 구조개선 타협을 추진중인 김대환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장에게도 조언을 남겼다.

“고생을 참 많이 하실 수밖에 없을 텐데, 이제 며칠 남지 않았으니 핵심 내용을 가지고 문 걸어놓고 대타협 전까지는 나갈 수 없다는 과단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반백년의 정치역정에서 국민경선제 도입을 또하나의 잊지못할 업적으로 든 반면 ‘DJP 연합’을 끝까지 살리지 못한 것을 가장 아쉬운 점으로 꼽았다.

▶70대 노정객의 思婦曲= 한 위원장의 인생에서 반려자인 정영자 여사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전북 전주 출신인 한 위원장은 학생운동시절 경남 진주 출신의 정 여사를 만나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영호남 커플이 됐다.

정 여사는 5년 전 폐암 말기 선고를 받은 뒤 고된 암투병 끝에 호전됐지만 최근 또다시 항암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한 위원장이 정 여사에 대해 말을 이어갈 때는 미안함이 짙게 묻어났다. 재야운동과 정치활동을 하는 동안 구속되는 등 평탄치 않은 자신의 삶 때문에 부인이 마음고생으로 병을 얻은 게 아닌가라는 자책감 때문인 듯 했다.

“정치하는 사람의 부인은 반정치인이 돼. 가정을 팽개치지는 않았지만 가족들을 너무 혹사시켰지. 내 손발이 안 닿는 곳은 집사람이 다 챙겨주곤 했어요. 처음 아프고 나서 전국 안다닌데 없이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또 항암치료를 받고 있어요. 내가 너무 속을 썩여서 그렇지. 미안할 뿐입니다.”

공무 외의 대부분의 시간은 정 여사와 함께 지내고 있다.

“집사람한테 진 그 많은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이젠 둘이 사니깐 간호사 역할 잘하는 거 밖에는….”이라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는 정 여사와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으며 미국에 거주하는 아들과 서울에 있는 딸의 손주가 모두 셋이다.

한평생 정치에 몸 담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지켜본 아들딸이 정치에 대해서는 아주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며 싱긋 웃었다.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은 한국현대사에 굵은 족적을 남긴 거인이자 암투병중인 부인 정영자 여사를 향한 애정이 지극한 로멘티스트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2년여간 대통합이라는 기차가 달리기 위한 레일을 깔았으며, 이젠 더디지만 한번 데워지면 오랫동안 식지 않는 구들장을 데우는 심정으로 다가가고 있다고 말했다.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국민대통합을 위해…‘레일론’과 ‘구들장론’= 한 위원장의 시선은 지금 국민대통합이라는 우리 사회의 절실하지만 쉽지 않은 과제를 향하고 있다.

박근혜 정부 초대 국민대통합위원장을 맡아 우리 사회에 내재된 상처와 갈등을 치유하고 공존과 상생의 문화 정착과 새로운 대한민국의 가치 도출을 목표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쉽지 않은 목표인 만큼 일부에서는 대통합위의 지난 2년여간의 활동이 다소 기대에 못미친다는 평가도 있다.

한 위원장은 이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70대의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눈빛을 반짝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건 어찌보면 당연합니다. 대통합위가 출범한지 이제 2년이 됐는데 해방 이후 국민통합, 사회통합의 필요성만 느꼈지 어떻게 할지 계획이 없었어요. 이제 해방 이후 최초로 중앙부처와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와 협력해 ‘국민대통합 종합계획’을 수립했는데, 국민대통합이라는 기차가 달리기 위한 레일을 깐 것이죠.”

통합에 대해서는 “공기가 어떻게 생겼느냐 말하기 어렵듯 통합도 표현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얘기”라며 “통합이 막연한 것 같지만 작은 실천을 통해 구체화하면 된다. 오케스트라가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각종 악기가 제 소리를 낼 때 좋은 음악을 연주할 수 있듯이 국민 개개인의 다양성 속에서 조화를 이뤄내는 게 통합”이라고 설명했다.

대통합위는 상향식 토론문화 정착을 위해 국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국민대토론회를 개최하는 한편 기초질서 지키기, 존중과 나눔실천 등의 ‘작은 실천, 큰 보람’ 운동을 전개중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한울 원전 주민갈등 현안조정 지원과 지역갈등 소지가 있던 운전면허증 지역표기 삭제, 그리고 10만원 이하 통원의료비의 경우 진단서 없이 영수증과 처방전만으로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는 소액 실손보험금 청구절차 간소화도 대통합위의 작품이다.

“예전 시골의 구들장이 쉽게 데워집니까. 그런데 한번 데워지면 식지 않고 온기가 오래 갑니다.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구들장을 데우는 심정으로 사회 곳곳과 국민 개개인의 생활 속에서 국민대통합의 온기가 널리 퍼질 수 있도록 뚜벅뚜벅 가야합니다.”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과 함께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국민대통합의 완성은 통일”=통일에 대한 강한 염원과 당위성도 강조했다.

“국민대통합의 완성은 통일인 동시에 통일의 기초작업이 국민대통합입니다. 후배들에게 통일을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는 당부를 하고 싶고, 나도 기회가 닿는다면 노력하고 기여하고 싶습니다.”

인터뷰 내내 통일한국이 20~30년 안에 프랑스, 독일, 일본을 추월할 수 있다는 골드만삭스의 전망 등을 예로 들며 평화통일의 길로 가야한다고 설파했다.

“일본이 20여년간의 장기불황 속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인구입니다. 한 국가가 자립하고 자생하려면 적어도 1억명은 돼야합니다. 통일이 돼 우리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자원과 노동력이 맞물리면 엄청난 시너지 효과가 분명합니다.”

후배 정치인들에게는 “정치하는 사람들은 국민을 떠나 존재할 수 없다. 등줄기를 국민에 두고 국민의 바람을 실현시켜주는 것이 대의정치의 기본”이라고 고언을 남겼다.

“현실에 실현된 정치가 결국 법인데, 국회가 법을 제때 만들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에선 직무유기에요. 여야간 견해차가 있더라도 국민에게 필요한 법은 빨리 세우는 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입니다.”

그의 확고한 정치론이다.

대담=김형곤 정치부장/kimhg@heraldcorp.com

정리=신대원 기자/shindw@heraldcorp.com



<한광옥 국민대통합위원장이 걸어온 길>

▷1942년 1월29일(음력) 생

▷1963년 서울대 문리대학 영어영문학과 수료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서울 관악구·민주한국당)

▷1985년 민주화추진협의회 대변인

▷1988년 평화민주당(평민당) 총재 비서실장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서울 관악구甲·민주당)

▷1990년 국회 노동위원장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서울 관악구甲·국민회의)

▷1992년 민주당 사무총장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범야권대통령후보 단일화협상 추진위원장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사무총장

▷1998년 노사정위원회 위원장

▷1998년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1999~2000년 제15대 국회의원(서울 구로구乙 보선, 국민회의)

▷1999년 대통령 비서실장

▷2001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

▷2002년 통일미래연구원 이사장(현)

▷2012년 제18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국민대통합위원장

▷2013년 대통령소속 국민대통합위원회 초대위원장(현)


■[내가 본 한광옥…정기인 한양대 경영학부 명예교수]

내가 한광옥을 처음 만난 것은 1960년 4월1일이었다.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영어영문학과 1학년 입학 때였다. 모두 남학생 17명과 여학생 3명이었다.

남학생 중 유독 키가 훤칠하고 미남 얼굴에 환한 미소를 품은 사나이가 눈에 띄었다. 한광옥과 나는 이렇게 만났다. 그 후 55년이 지났다. 나는 고엽제환자라 술을 입에 대지 않는데 두주불사하는 한광옥과 가까운 것을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다.

1960년 4월19일 영시(英詩) 수업시간에 선배들이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러 경무대로 가자고 불러냈다. 학생들은 수십 미터 쯤 되는 6열의 스크럼을 짜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한광옥은 용감하게도 맨 앞줄로 우리들을 끌고 갔다. 맨 앞줄이라 무술경관의 곤봉을 무수히 맞았지만 경무대 앞까지 갔다. 갑자기 총소리가 나며 학생들이 쓰러졌다. 모두가 흩어졌다. 나와 한광옥, 둘은 경무대 근처 구멍가게로 뛰어 들어갔다. 경찰들의 수색이 시작됐다. 나는 2층 창을 넘어 뒷길로 도망쳤다. 그러나 한광옥은 “죄지은 것처럼 도망치고 싶지 않다”며 그대로 버티다가 결국 마포형무소에 끌려가 이틀간 수감됐다고 했다.

이후 우리의 운명은 바뀌었다. 그는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고 결국 제명됐다. 나는 졸업 뒤 해병대 보병중위로 월남전에 참전한 후 고엽제로 사경을 헤매면서 약 10여년간은 두절된 채 지냈다. 1980년 초 내가 한양대학교 교수가 되고 한광옥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영문과 동기들이 함께 만났다.

정치가 한광옥을 바라볼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넓은 가슴에 ‘창조적 욕망’을 품고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정치에서 창조는 결백, 의리, 대의명분, 자기희생 등 순수함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그는 눈앞의 이익보다 손해를 감수해 왔다. 지금도 그는 남북통일과 동서지역 화해, 계층갈등 해소라는 막막한 과제를 창조적 미래로 여기고 있다.

친구로서 정말 놀란 일이 있다. 부인 정영자 여사가 폐암 말기로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일 때다. 그는 단 하루도 부인 곁을 떠나지 않은 채 꼬박 2년간을 ‘밀착’ 간호했다. 그 많은 정치 동지들이 불러내도 응하지 않았다. 그 덕에 부인은 완치에 가까운 결정을 받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요즘 재발했다고 한다. 그는 국민대통합위원장이지만 저녁 식사는 공적인 사무나 약속, 그리고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반드시 부인과 함께 하고 있다. 그의 인간다운 순애보에 박수를 힘껏 보내며 부인의 완쾌와 보람찬 미래가 창조되기를 염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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