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바람난세계사] 전쟁은 변질된다…‘4차’ 십자군 이야기
라이프| 2015-04-06 12:21
[HOOC=이정아 기자]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 서유럽 기독교 국가들은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십자군 전쟁을 감행했습니다. 200년 가까이 무려 8차례에 걸쳐 치른 종교전쟁이었죠. 그런데 역사상 가장 치열한 종교 간 싸움이 길어지면서, 종교의 ‘성스러움’이라는 초심은 많이 변질됐습니다. 이 전쟁이 약탈과 약소국가에 대한 엉뚱한 공격으로 번져 ‘진흙탕 싸움’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오늘은 가장 악명 높았던 원정으로 꼽히는 4차 십자군 원정과 소년 십자군 원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신이 인도해 주시리라’= 11세기 중반 기독교 세계의 한 축인 비잔틴 제국은 기력을 잃고 있었습니다. 아라비아인을 내몰고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게 된 셀주크 투르크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급속히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1055년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1071년에는 비잔틴 제국군을 격파해 해안지대를 제외한 소아시아를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이로 인해 서유럽 사람들은 예수살렘을 셀주크 투르크의 손에서 탈환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고, 때마침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을 받은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우스 1세가 로마의 교황 우르바누스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요청을 받은 교황 우르바누스 2세. ‘기회는 이때다’ 싶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가 동서로 분열된 유럽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에 전쟁만 한 게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동방의 비잔틴 제국이 서방의 로마 교회의 우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를 뒤집을 만한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1095년 가을, 교황은 프랑스의 클레르몽 종교 회의에서 십자군을 제창합니다. 

클레르몽 종교 회의에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는 교황 우르바노 2세. 당시 청중들은 교황의 연설에 감격한 나머지 “이건 하나님의 뜻이다”고 외치며 성지 회복을 위해 싸울 것을 맹세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서구의 기독교인들이여,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돈이 많은 자나 가난한 자나 기독교인을 구원하는 일에 진군하자. 하나님이 인도하시리라.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싸우다 쓰러지는 자에게는 죄 사함이 있으리라.”

서유럽 전역에 걸쳐 기사와 농민, 부랑자까지 대거 십자군 지원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기독교 성지에 대한 이슬람의 박해를 막는다는 명분이었죠. 하지만 십자군에 지원한 사람들의 눈앞에는 막대한 전리품이 어른거렸을 겁니다. 당시 교황청도 성지 예루살렘에 금은보화가 있다며 무명의 기사들을 꾀어 부추겼고 상속받을 토지와 재산이 없던 봉건 귀족의 차남 이하의 기사들과 거리의 부랑자들이 주로 십자군에 지원합니다. 

▶진흙탕 원정이 시작되다= 반격 끝에 1187년 예루살렘을 되찾은 1차 십자군. 하지만 이후 원정에서 십자군은 헝가리와 비잔틴 제국에서도 약탈을 일삼기 시작합니다. 이 가운데 가장 추악한 전쟁은 4차 십자군 원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인노켄티우스 3세. 1202년 4차 십자군 원정을 승인하지만 정작 원정에 나선 십자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의 손에 파문을 당하거든요.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병력 수송과 식량 공급을 의뢰한 4차 십자군. 하지만 예상보다 훨씬 적은 병력만이 모이게 됩니다. 원정에 나서지 못하는 사이, 4차 십자군이 지게 된 빚은 천문학적으로 증가했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원정대에게 베네치아 당국이 기발한 제안을 합니다. 헝가리 기독교인들이 점령한 자라 시를 탈환해 주면 모든 빚을 탕감해 주겠다는 것. 베네치아 당국은 자라 시를 점령해 지중해 동부 지역의 교역권을 독점하고 싶었습니다.

1202년, 4차 십자군은 이런 제안을 넙죽 받아 성지 예루살렘이 아닌 자라 시를 어렵지 않게 점령합니다. 하지만 이내 곤경에 빠집니다. 분노한 교황이 ‘십자군 전원 파문령’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공황에 빠진 십자군에게 또 다른 유혹이 찾아옵니다. 동로마 제국에서 추방당한 이사악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한 뒤 황휘를 찬탈한 삼촌을 내쫓아달라”며 엄청난 제안을 내놓기 때문이죠. 성공시 ‘20만마르크 지불, 병력 1만명 지원, 동서교회의 통합.’

결국 십자군은 1203년 7월 아침,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넘습니다. 이틀 뒤 도시를 손에 넣은 십자군은 노략질에 눈이 어두워 불을 지르고 라틴 제국을 세우기까지 합니다. 대의를 상실한 이후 십자군운동은 급속도로 추진력을 잃게 됩니다.

▶소년병, 꿈을 먹고 전진하다= 경악할 만한 원정은 또 있습니다. 4차 십자군 원정이 끝나고 10여 년이 지난 어느 날. 프랑스 북부의 한 마을에 사는 양치기 소년, 에티엔이 “신의 계시를 받았다”며 출처불명의 편지 한 통을 들고 마르세유로 나아갑니다. 이 편지를 임금에게 전하라는 계시를 받았다는 것이었죠.

신의 계시라는 한 마디에 3만 명의 아이들이 모여들어 비극적 최후를 맞이했다. 소년 십자군은 종교적 열의가 비정상적인 형태로 표출된 그 시대의 분위기를 잘 보여 주는 사건이다. 구스타프 도레의 삽화.

성지 회복의 종교적 대의가 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던 걸까요. 수천 명의 소년 소녀가 부모나 신부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에티엔의 뒤를 따릅니다.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던 길거리의 고아들도 쉽게 이 소년 십자군 무리에 휩쓸리죠. 고작 열두서너 살의 어린 아이들이 3만 명에 이르게 됩니다. 국왕의 해산 명령에도 귀 기울이지 않던 이 소년 십자군은 마르세유에서 일곱 척의 배를 타고 원정을 떠납니다.

하지만 결말은 좋지 않았습니다. 두 척의 배는 난파됐습니다. 그리고 배를 수송한 선주는 나머지 다섯 척의 배에 탄 아이들을 모두 아프리카 등지의 노예로 팔아버립니다. 악덕상인의 꾐에 어린 소년병들이 넘어가게 된 것이죠. 그나마 다행인 건 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2세와 알렉산드리아 술탄 사이에 화해가 이뤄지면서 십자군으로 끌려간 노예 700여 명이 해방된 것입니다. 어린 노예들이 가여워 이슬람 주인들이 아이들을 풀어주기까지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 ‘옳은 것’만 말하는 신이 바란 일이라고 하니 적어도 누군가는 ‘옳은 전쟁’만은 역사 속에 남기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남은 이 십자군 전쟁은 갇힌 세계 속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면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적확하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전쟁을 이끈 측이나 이끌려나간 측 모두 역사에 함몰되는 순간 역사의 교훈은 사라지고 오직 자신들의 잘못된 신념과 믿음만이 남게 되는 것이죠. 십자군 원정은 명분마저 뒤집은 추악한 전쟁의 전형이었습니다.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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