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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X파일] 책상서랍 전전하던 '빨간책'의 진화
뉴스종합| 2015-05-19 11:21
[헤럴드 경제=서지혜 기자] 내 이름은 ‘빨간 책’입니다.

수십년 간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호환마마보다 무섭다’며 나를 만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때문에 나는 한동안 선생님의 눈을 피해 까까머리 중학생들의 답답한 책상 서랍을 전전긍긍했습니다.

여전히 어른들은 나를 경계하지만 의도치않게 최근 10여년 간 나는 아이들과 더 친해지고 가까워졌습니다. 인터넷이라는 바다를 항해하며 보다 쉽고 편하게 아이들을 만날 수 있게 됐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나는 ‘플레이보이’와 같은 잡지나 비디오의 모습으로 아이들을 만났었죠.

하지만 90년대 들어 컴퓨터가 생기면서 모니터 화면으로 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친구들끼리 서로 제가 담긴 디스켓이나 CD를 돌려보기도 했었죠.

최근엔 아이들의 손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저를 접하는 아이들이 늘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2015청소년통계’에 따르면 간행물이나 비디오 등을 통해 성인물을 접했다는 아이들은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난해 간행물로 성인물을 접했다는 청소년은 34.1%로 2012년 40%에 비해 줄었고, 비디오ㆍDVDㆍCD 등은 3.4%에 불과했습니다.

컴퓨터를 통한 성인물 경험 역시 2012년 45.5%에서 지난해 26%로 급감했습니다. 

이제 나는 ‘카톡’을 통해 아이들과 접선합니다. 청소년 유해매체 이용 경험률 중 ‘휴대폰을 통해 성인물을 접했다’고 답한 청소년의 비율은 전체의 52.6%에 달해 2012년 20.5%에 비해 약 3배나 증가했습니다.

스마트폰을 통한 아이들과 나의 만남은 이미 어른들이 막을 수 없는 문제가 된듯합니다.

과거에는 집이나 PC방에서 부모님이 오실까 초조해하며 음란물을 봐야 했지만 이제는 휴대폰으로 클릭만 하면 어디서든 음란물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이 더욱 깜짝 놀랄 일은 이제 아이들은 더이상 나를 ‘돌려보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청소년들은 스스로 음란소설을 쓰고, 자신이 야동의 주인공이 돼 동영상을 만들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음란물을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공유하고 ‘섹드립(성행위에 관한 대화)’으로 평가 받습니다.

실제로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가 자신의 얼굴 및 신체를 노출한 채 음란행위 장면을 직접 촬영, 동영상 사이트에 게시한 청소년 43명을 적발했을 당시 아이들 중에는 초등학교 2학년 어린이까지 포함돼 어른들을 경악케 했죠.

이 아이들은 트위터나 페이스북 팔로잉 숫자를 늘려 과시하기 위해 신체를 공유했고, 성행위를 연상케 하는 음란한 대화 및 음란물을 주고받기까지 했습니다.

뒤늦게 어른들은 우왕좌왕하며 이제서야 나를 모두 수거하겠다고 나섰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울 겁니다.

대부분의 SNS는 해외에 근거를 두고 있어 수사기관이 차단하기가 쉽지 않거든요.

전세계에 퍼져있는 음란물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이를 다 찾아내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청소년들의 스마트폰에 유해매체물을 차단하는 앱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법을 개정했지만, 부모님의 주민등록번호로 가입하는 아이들까지 막지는 못하겠죠.

어떤 목적으로 내가 세상에 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이들과 친해지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닌듯합니다.

아이들의 끔찍한 성범죄가 자꾸 나 때문이라고 하니까요. 어려운 일이겠지만 아이들이 저랑 친해지기 전에 더 많은 성에 대한 교육을 받았으면 합니다. 막는다고 막아질 일이 아닌 만큼 학교에서, 집에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gyelov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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