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일반
부처님 오신날 가볼만한 천년고찰 셋
라이프| 2015-05-25 12:10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 서울과 가까운 인근에는 빼어난 풍광과 수많은 이야기를 지닌 천년 고찰이 적지 않다. 특히 불교는 국난과 함께 해온 역사가 있어 역사를 되돌아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가족나들이 삼아 서울 인근 가볼만한 사찰을 소개한다.

▶ 여주 신륵사는 경관이 빼어난 사찰로 이름이 높다. 신륵사 신라 증평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 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일러준 후 그 곳에 절을 지으려 하니 뜻대로 되지 않자 원효대사가 7일동안 기도를 올리자 9마리의 용이 그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승천한 후에야 그곳에 절을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신륵사는 예로부터 풍광이 좋기로 이름이 높았다. 조선후기 문인 김병익은 ‘신륵사중수기’에서 신륵사의 명성을 이렇게 서술했다.
“절을 세우고 폐하는 것이 세상의 가르침이 될 수 없거니와 유학자로서도 이를 위하여 노력할 일은 아니지만 절은 폐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고적이 명승지로 이름 높은 곳이기 때문이다. 신륵사라는 절은 고려시대의 나옹이 머물러 있었으며 항상 아름다운 경치는 물론이고 또한 높은 탑과 오래된 비가 늘어진 것이 옛스러워 목은을 비롯한 여러 문인들이 시로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여주는 산수가 청수하고 그윽하며 또한 평원하고 조망이 좋으며 이와 더불어 신륵사는 높고 서늘한 것이 겸하여 있으니 그 경치가 절승한 지경과 같다, 오직 이 두가지 이유로 온 나라에서 일컬어 온지가 이미 천년이나 되었으니 비록 내가 절을 세우지 못할 망정 폐할 수 있겠는가”

여주의 아름다운 경치 ‘여주팔경’ 중 으뜸이 신륵사에서 울리는 저녁 종소리일 정도로 시공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인천 강화도 서쪽 석모도에 자리한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기도 도량으로 앞 마당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풍경이 남다르다.

특히 석모도 낙가산 중턱 눈썹바위 아래 마애불상앞에는 불자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석양은 절경으로 꼽힌다.

강화 보문사는 신라 선덕여왕4년(635년)회정대사가 금강산에서 수행하던 중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하고 강화도로 내려와 창건했다고 전한다. 창건당시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낙가산이라고 하고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해 보문사라 이름지어 보문사가 창건당시부터 관음도량임을 보여준다.

보문사를 창건한지 14년만인 649년 석가모니 부처님과 미륵보살 등 스물두분의 석상을 바다에서 건져 올려 석굴 법당에 모신 나한전 조성일화가 전한다,

▶안성 칠현산 기슭에 있는 칠장사는 규모는 크지 않으나 역사만큼오랜 이야기와 천년 고찰의 그윽하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선덕여왕 5년(636)에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는 칠장사는 칠현인(七賢人)이 오래 머물렀다 하여 칠장사라고 전한다. 칠장사는 많은 보물을 지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일주문 앞으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철당간은 지방 유형문화재 39호, 고려시대 혜소국사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혜소국사비는 보물 488호,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를 원당으로 삼아 사찰을 중건하여 친히 김광명에게 하사한 것으로 전해지는 인목대비친필족자는 지방 유형문화재 34호로 지정됐다.

인목대비는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자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을 위하여 칠장사를 원찰로 삼고 자주 찾았다. 그때 인목대비가 쓴 ‘금광명최승왕경’ 10권 1질과 자신의 한스런 심정을 토로한 시가 친필 족자(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전해오고 있다. 국보 296호로 지정되는 오불회괘불은 큰 행사 때에만 볼 수 있어 괘불을 보기 위해 특히 많은 사람이 몰려들기도 한다.

칠장사에는 신라 협안왕의 서자인 궁예가 13세까지 활쏘기 연습을 한 활터가 남아있고,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 나오는 일곱 도적과 갖바치 스님 이야기의 배경이 된 곳으로도 유명하다.
특히 고려 말 왜적의 피해가 극심할 때 충주 개천사에서 보관하던 나라의 사서(史書)를 이곳 칠장사로 옮겨 8년간 비장해 소실을 면한 일이 있다. 임진왜란 때 적장 가토 기요마사는 혜소국사비의 신통력에 혼비백산해 돌아갔다는 통쾌한 전설도 있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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