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개천의 꿈’이룬 판자촌 소년, 40여년뒤…
뉴스종합| 2015-05-29 11:03
11살 소년은 판자촌에서 살았다. 서른넷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는 떠났다. 젊은 아내, 그리고 소년까지 어린 아이들만 남았다. 소년이 가장이 된 나이, 11살이었다.

청계천 판자촌마저 사치였을까. 도시 정비사업으로 또다시 집을 잃은 소년과 가족은 성남 허허벌판으로 내몰렸다. 천막을 집 삼아 살아야 했다. 판자촌에서 천막으로, 조금씩 세상에서 멀어질수록 소년의 꿈도 작아졌으리라. 11살 가장의 여린 어깨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에 내몰렸다. 꿈? 그 누가 그에게 꿈을 말할 수 있을까.
11살 판자촌 소년에서 국무조정실장, 그리고 아주대 총장으로…. 김동연 총장은 교육이 바로 선다면, 개천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아니다. 그래도 소년은 꿈을 꿨다. 아니, 이를 악물고 꿈을 붙잡았다. 그로부터 40여년. 소년은 기획재정부 2차관, 국무조정실장(장관급)을 거쳐 아주대 총장으로 돌아왔다.

소년은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졌다. 그런데 소년은 지금도 꿈을 꾼다. 삶에 지쳐, 생존에 몰려 꿈을 포기하려는 청춘에게 꿈을 되돌려 주는, 더 큰 꿈을 그렸다. 단돈 90만원이 없어 대학 입학을 포기하려 했던 3학년생 홍지혜(가명) 씨도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김동연 아주대 총장, 그리고 학생들이 함께 그려가는 꿈 이야기다.

▶쓰레기통에서 찾은 고시책, 그의 인생을 바꾸다=판자촌, 천막집을 전전하며 김 총장은 덕수상고에 진학했다. 당장 어머니,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에게 대학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은행에 취직했다. 만 17세였다. 그는 “은행에 들어가서 우쭐했던 기분은 곧바로 힘든 현실과 부딪혔다”며 “‘고졸’이란 벽은 높았다. 100m 달리기 시합에서 50m쯤 뒤진 출발선상에서 뛰는 기분”이라고 회상했다.

야간대학에 다녔다. 낮에는 은행 일을, 밤에는 대학을 다녔다. 그래도 목말랐다. 우연히 쓰레기통에 버려진 고시 잡지를 접하고서, 그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됐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며 그는 입법고시, 행정고시에 모두 합격했다. 그래도 일은 그만둘 수 없었다. 합격 후 공직발령을 받는 날 그는 은행 일을 그만뒀다. 만 25살이다. 

김 총장은 “소년기에서 청년기에 걸친 그 시절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역시 세상을 원망했다. 생존’만’을 위한 삶에 절망했다. 하지만, 끝까지 꿈을 놓지 않았다.

실화를 다룬 영화 ‘행복을 찾아서’의 주인공 크리스 가드너는 전 재산이 21달러 33센트에 불과한 노숙자다. 집을 잃고서 어린 아들과 화장실을 집 삼아 숨어 지냈다. 경비원에게 들킬까 숨죽여 잠을 청하면서도 그는 아들에게 말한다. “넌 못할 것이란 말, 절대 귀담아듣지 마. 꿈이 있다면 지켜야 해.” 크리스 가드너는 이후 증권회사 최고경영자(CEO)가 된다. 크리스 가드너와 김 총장, 이역만리 떨어진 두 인물의 인생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

▶김 총장의 성공신화, 그리고 개인사=상고, 야간대 출신임에도 김 총장은 승승장구했다. 기획예산처 사회재정과장, 전략기획관, 재정정책기획관,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기획재정부 예산실장, 기획재정부 2차관, 국무조정실장까지 올랐다.

겉모습은 화려해 보이지만 없는 길을 개척하기까지 말 못할 노력이 필요했다. 그 사이 김 총장은 미시간대에서 정책학 석ㆍ박사 학위를 땄다. 국가 장학금, 미국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서 3년 9개월 만에 끝냈다. 김 총장은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노력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다”고 밝혔다.

그의 성공신화 뒤엔 아픈 개인사도 있다. 여러 차례 언론에 조명됐지만, 여전히 꺼내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국무조정실장 시절 그는 장남을 앞세웠다. 일찌감치 아버지를 잃었던 슬픔, 그리고 아들을 앞세운 고통. 장남 발인 날조차 그는 원자력발전소 비리종합대책을 가다듬고 바로 다음날 발표해야 했다. 아들을 잃은 고통마저 내색할 수 없었다.

그는 ‘혜화역 3번 출구’가 괴롭다고 한다. “큰 애가 서울대병원에 입원하면서 병원 가는 길인 혜화역 3번 출구는 가슴 찢는 고통을 안고 걷는 길이 됐다”는 이유에서다. “28살 나이로 영영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린 큰애가 지금도 씩 웃으며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것 같아 주위를 둘러보곤 한다. 어린이날을 생일로 둬서 그 즈음엔 더욱 그렇다”고도 말했다.

세월호 사태에 가슴이 무너졌던 이유이기도 하다.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 자식을 따라 나도 가고 싶은 심정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지난해 7월 돌연 국무조정실장을 사임하고 경기도 한 초막으로 사라졌다. 모든 경력을 뒤로 한 채 말이다. 화려한 성공신화와 한 깊은 개인사, 그리고 갑작스러운 사퇴. 김 총장의 지난날은 한두 문장으로 정리하기 힘들다.

▶아주대 총장, 그의 새로운 꿈=올해 초 아주대 총장으로 선임되면서 김 총장은 다시 돌아왔다. 소년은 아주대에서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 꿈에는 많은 이들의 꿈이 중첩돼 있다. 먼저 보낸 아들의 못다 이룬 꿈, 세월호와 함께 기억해야 할 아이들의 꿈, 그리고 그 시절 본인처럼 현실에 짓눌려 고통 받는 이 시대 청춘들의 꿈.

아주대 총장으로 취임해 그는 ‘100만원의 기적, 애프터 유(After You)’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어려운 환경으로 꿈을 잃어가는 청춘들에게 해외 명문대를 체험할 기회를 주는 프로젝트다. 100만원씩 기부를 받기로 했다. 그는 “1명에게 1억원을 기부 받는 것보다 100명에게 100만원을 받고자 한다”며 “나보다 어려운 친구들을 먼저 보내자는 뜻으로 ‘애프터 유’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밝혔다. 그의 어려웠던 시절이 없었다면 생각지 못했을 프로젝트다. 소년의 경험은 더 큰 꿈의 자양분이 됐다.

아주대 3학년생인 홍지혜 씨도 ‘애프터 유’ 지원을 받아 오는 7월 미시간대로 떠난다. 어린 시절 부친이 사업에 실패한 이후 홍 씨는 홀로서기를 시작했다. 대학에 합격했지만, 입학금 90만원이 없어 대입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학자금 대출로 입학금과 등록금을 냈다. 지금은 과외 3개, 아르바이트를 병행해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고 있다. 장학금도 홍 씨에겐 생존을 위한 ‘필수’다.

홍 씨는 “요즘 다들 어려워 이렇게 학업과 돈벌이를 병행하는 친구들이 많다”며 “해외대학은 생각도 못했다. 이런 기회를 얻게 돼 믿기지 않는다”고 기뻐했다. 홍 씨는 에너지 분야 전문 연구원이 꿈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연구원을 위한 진로도 고민하고, 외국인 친구도 사귀고 싶다고 한다. 견문을 넓혀 해외로 진출하는 미래도 그려본다. 홍 씨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교육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김 총장은 교육의 힘을 믿는다. 교육이 인식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는다. “좋은 대학을 가고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인식되는 사람은 아무리 높게 잡아도 5%를 넘지 않습니다. 그들이 게임의 룰을 만들죠. 실패자라 평가받는 95%는 이에 동의하지 못하고, 그러다 보니 갈등의 골이 깊어집니다.” 95%를 실패자로 인식하는 사회, 95%가 스스로 낙담하고 포기하는 사회. 이런 인식을 극복해야만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유쾌한 반란’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란은 현실을 극복하고 변화시켜 미래를 만드는 의지의 표현이며, 스스로 열정을 갖고 새 길을 열 수 있는 통로라 말했다. 그는 환경에 대한 반란, 나 자신에 대한 반란, 사회를 건전하게 바꾸는 반란을 언급했다.

김 총장은 “주변 환경, 그리고 나부터 틀을 깨는 반란을 해보는 것”이라며 “학생은 학생대로, 교수는 교수대로, 직원은 직원대로 각각의 틀을 깨는 반란을 원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아주대를 통해 사회를 건전하게 바꾸는 반란을 이루겠다는 게 그의 포부다. 그는 “대학 본연의 임무가 사회 변화에 대한 기여”라며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만드는 데에 아주대가 일조하고 싶다”고 힘주어 말했다.

세상은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믿는다. 교육이 바로 선다면, 여전히 개천의 꿈은 유효하다고 말이다.

김 총장은 인터뷰를 마치며 기자에게 ‘걸리버 여행기’ 완역본을 선물했다. 걸리버 여행기는 모험소설이 아니라 인간과 정치를 위트 있게 묘사한 풍자소설이란 평과 함께다. 일독을 꼭 당부하는 모습에서 스승의 향기가 느껴졌다. ‘전 국무조정실장 김동연’이 아닌 ‘총장 김동연’이다. 판자촌에서부터 시작된 소년의 변신, 그리고 도전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김상수 기자/dlcw@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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