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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3만명 시대의 그늘…법정가는 ‘탈북 브로커 계약’ 효력은?
뉴스종합| 2015-06-16 12:33
[헤럴드경제=강승연 기자]#. 북한 주민 A씨는 지난 2004년 12월 탈북 브로커인 B씨와 한국까지 무사히 입국하는 것을 도와주는 내용의 계약을 맺었다. 

A씨가 B씨에게 500만원을 갚아야 한다는 차용증 형태로 계약서도 썼다. A씨가 몽골을 거쳐 한국에 들어오자 B씨는 이를 근거로 “500만원을 내라”며 소송을 냈다. 

그러나 법원은 A씨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B씨는 전문 탈북 브로커인 반면 A씨는 상시 북한으로 송환될 위험에 노출된 상황에서 약정의 의미나 효력 등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계약을 맺을 수 있다”며 계약은 무효라고 판단했다.
사진=게티이미지

분단 이후 70년, 북한 이탈주민의 수가 3만명에 육박하면서 탈북 과정을 둘러싸고 법정 다툼을 벌이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탈북 이주민 10명 가운데 8, 9명이 쓴다는 ‘탈북 용역계약’이 분쟁의 발단이 되는 경우가 많아 그 법적 효력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6일 통일부에 따르면 분단 이후 올해 5월까지 한국에 입국한 북한 이탈주민 수는 2만8054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탈북주민들을 북한과 중국 국경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제3국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게 도와주는 이른바 ‘탈북 가이드’, ‘탈북 브로커’들이 등장했다. 탈북자 80∼90%가 이들의 도움으로 몽골이나 동남아 국가를 통해 입국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탈북주민이 한국에 도착한 뒤 브로커와 맺은 탈북 용역계약에 근거해 소송을 제기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이 같은 소송의 최대 쟁점인 탈북 용역계약의 효력 인정 여부를 놓고 법원의 고민도 덩달아 깊어지고 있다.
북한 이탈주민 한국 입국 현황 [자료출처=통일부]

최근 법무부 계간지 ‘통일과법률’에 게재된 의정부지법 김영기 판사의 논문에 따르면, 탈북 용역계약의 효력을 판단하는 데 그 계약이 외국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가 관건이 된다. 국외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고 중국 국적의 조선족 브로커가 흔히 개입하는 탈북 계약 특성상 국내법을 적용하기 힘들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대법원은 거래 당사자의 국적ㆍ주소, 물건 소재지, 행위지, 사실 발생지 등이 외국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어 곧바로 내국법을 적용하기보다는 국제사법을 적용해 그 준거법을 정하는 게 더 합리적으로 인정될 땐 국제사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시한 바 있다.

다만 김 판사는 외국적 요소가 상당한 사건이라 할 지라도, 대부분의 탈북 용역 계약과 같이 대금을 남한에 입국한 후에 지급하기로 하고, 계약의 당사자가 모두 모두 한국 국민인 경우에는 우리 법원에 재판관할권이 있다고 설명했다.

준거법을 결정할 때는 탈북자와 브로커가 서로 한국법을 준거법으로 하는 명시적ㆍ묵시적 합의를 한 경우를 제외하고, 브로커의 ‘상거소’(상당기간 거주하는 곳)가 있는 나라의 법률이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중국 국적 탈북 브로커가 중국에서 거주해 중국법을 준거법으로 할 경우, 용역 계약에 중국 공문서 위조나 불법 월경, 뇌물 제공 등과 같이 중국 자체 법규를 위반하는 내용을 포함하게 되면 무효 내지 취소사유에 해당할 가능성이 높다.

국내법을 준거법으로 삼을 때에도 많은 사건에서 탈북 용역계약이 반사회질서ㆍ불공정한 법률행위(민법 103조ㆍ104조)에 해당하는지가 주요 쟁점이 되고 있다. 법원은 통상적으로 거래되는 용역대금 액수보다 약정금이 지나치게 많을 때, 그 약정이 현저하게 공정을 잃은 법률행위에 해당해 법적 효력이 없다고 판단하는 추세다.

반면 한국에 입국해 북한 송환 위험이 사라진 탈북자에게 브로커가 현금영수증을 교부하는 등 불공정한 법률행위로 볼 수 없을 땐 법적 효력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관련 김 판사는 “다수의 북한 이탈주민도 스스로 대금 지급의무를 인정하고 있는 점, 탈북 용역계약의 효력을 손쉽게 부정하는 경우 북한 이탈주민의 인권에 오히려 악영향을 가져올 수 있는 현실 등을 고려할 때 민법 104조에 따른 계약 무효 판단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면서 “약정 대금이 부당히 과다한 경우에는 법적으로 인정되는 범위 내로 감액된 보수만을 청구할 수 있다고 해석함이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그밖에 계약 이행 여부가 문제가 되는 사례도 있다.

브로커에게 선금 5000위안을 내고 태국에 입국했으나 경찰에 붙잡혀 라오스로 추방됐다가 자신의 힘으로 한국에 입국한 탈북자의 경우, 법원은 브로커가 위임사무를 완료하지 못해 약정된 보수를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spa@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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