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당
[취재X파일] 사과의 정치학
뉴스종합| 2015-06-27 08:23
[헤럴드경제=홍성원 기자]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지난 26일 박근혜 대통령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전날 국회법 중재안에 거부권 행사를 공식화하면서 유 원내대표에 대한 불만을 여과 없이 드러낸 지 하루만입니다.

정치권에선 장탄식이 터져 나왔습니다. 지난해 청와대 비서진을 향해 ‘청와대 얼라들’이라며 기개 넘치게 할 말 하던 정치인이 ‘급사과’를 한 데 대해 ‘권력의 공포성’을 얘기하는 부류가 적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숫자의 정치인ㆍ고위 공무원들을 목격해온 바, 각계에서 빗발치는 사과 요구에 유 원내대표처럼 즉각적으로 화답한 사례는 흔치 않습니다(사실 박 대통령은 전날 국무회의 격정 토로에서 유 원내대표의 퇴진을 행간에서 요구했지 사과를 하라고 한 건 아닙니다). 

대체로 ‘유감스럽다’, ‘송구하다’로 갈무리를 해왔죠. 유승민 원내대표는 달랐습니다. 26일 국회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그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통해 “박 대통령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박 대통령께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대통령도 저희에게 마음 푸시고 마음을 열어주시길 바란다”고 했습니다. ‘죄송’이라는 단어를 두 차례나 썼습니다.

박 대통령과 유 원내대표의 얄궂은 인연은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박 대통령이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역임했던 유 원내대표의 연을 말하는 겁니다. 애증의 관계이니 둘 사이의 앙금이 있다면, 이런 사과로 오해가 풀어진다면 나쁠 것이 없을 겁니다. 적어도 둘이 사인(私人)이라면 말이죠,

그러나 협상이 ‘본령’이자 ‘업(業)의 본질’인 정치에선 둘 다 공인이란 게 문제입니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과를 말했으니, 과거를 끄집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작년 4월 진도 앞바다의 아픔과 절망에 대해 박 대통령은 거세게 일었던 사과 요구를 미루고 미루다 참사 34일만에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최종 책임은 대통령인 저에게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죄송하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현재로 돌리겠습니다. 일각에선 세월호 참사 때처럼 현재 진행 중인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사태에도 피로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야당은 박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합니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박 대통령에게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던 즈음,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대국민 호소문을 통해 메르스 관련 박 대통령이 사과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야당의 래퍼토리죠. 일만 터지면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이쯤에서 최근 청와대 관계자와 사석에서 나눈 대화의 일부를 전합니다. 메르스 사태에 대한 박 대통령의 사과에 관한 겁니다. 그는 “(대통령이) 사과를 하면 발목을 잡힙니다. 여기서도 사과, 저기서도 사과…”

사과는 어렵다는 얘깁니다. 이 말은 세월호 때도 들었던 겁니다. 대통령이 사과를 하면 큰 일이 난다고 생각하는 게 청와대의 기류인 겁니다. 박 대통령만 비난할 수 없습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거의 모든 정치인, 고위공무원은 사과를 하라고 하면 유감이라고 하니까요.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은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과를 받을까요. 박 대통령이 지난 25일 국무회의에서 밝힌 내용과 그의 목소리 톤을 감안하면,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박 대통령과 친하다고 해서 언론이 수식어격으로 쓰고 있는 ‘친박계’ 의원들도 말합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이 박 대통령 발언의 엄중함,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요.

이 대목에서 유승민 원내대표는 왜 ‘죄송하다’고 했느냐는 의문이 남습니다. 유 원내대표는 국회법 개정안 문제로 청와대의 심기가 불편해졌다는 사실이 전해진 이달 초부터 언론에 대고 “입장 표명은 나중에 하겠다“고 뜸을 들였습니다. 대략 한 달 가량의 숙려기간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이 사과인 겁니다. 답은 정치가 내야 할 판입니다.

김무성 대표의 말처럼, 새누리당을 세운 건 박근혜 대통령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언제든 독자 세력화할 수 있는 국내 유일의 정치인이 박 대통령인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요. 내년엔 총선이 있습니다. ‘박근혜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는 선거 캠페인의 효력은 이전과 같지 않더라도 유통기한은 남아 있을 시기입니다. 유 원내대표는 권력구조와 인지도 측면에서 박 대통령에겐 ‘얼라’인 겁니다. 중뿔난 행동으로 여당내 지형 전체를 흔들 ‘파워’가 유 원내대표에겐 부족합니다.

‘유승민의 사과’를 정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치인들은 그래서 사과하라고 할 때 ‘유감스럽다’로 대체해 오는 걸 수도 있습니다. 현실과의 타협, 양심과의 줄다리기입니다.

hongi@heraldcorp.com

랭킹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