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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자 인권은 넘쳐나는데…상처 덧나는 피해자
뉴스종합| 2015-07-16 08:59
[헤럴드경제=양대근ㆍ강승연ㆍ김진원 기자] #. 지난달 대법원은 중학생 A양의 집 앞까지 따라가 성희롱을 자행한 30대 남성 윤모씨에 대해 무죄를 확정했다. A양이 법정에 직접 나와 경찰에서 했던 진술을 확인하는 ‘구인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법원이 나이 어린 여성피해자의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 법 절차를 따르는데만 관심을 기울였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 올해 3월 경남 창원에서는 업무방해죄로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던 가해자 B씨가 앙심을 품고 피해자 C씨를 찾아가 “네가 나를 잡아넣으려고 작정했다. 가만두지 않겠다”며 보복 협박을 일삼다가 결국 경찰에 구속됐다. 피의자가 피해자 연락처를 경찰에서 얻어간 것이 알려지며 논란이 되기도 했다.

범죄피해자를 보호ㆍ지원하기 위한 사법당국과 정치권, 민간단체의 노력이 결실을 맺으면서 관련 각종 법령과 제도가 국내에서 빠른 속도로 정비되고 있다.

하지만 진술거부권, 국선변호인의 조력, 피고인에 유리한 증거에 대한 검사의 고지 의무, 피고인 법정 항변 장치 강화, 보석, 구속적부심, 구속기간 제한, 포승줄 해제 등 피의자ㆍ피고인이 갖는 권리에 비해, 피해자가 피해를 거리낌 없이 알리고 보복을 피할수 있는 장치는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아, 피해자 인권보호 장치가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A양과 C씨의 사례처럼 법원이나 수사기관의 무관심, 제도적 허점, 사회적 편견 등으로 인한 2차ㆍ3차 피해는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인식 개선과 예산 확보를 통해 그동안 정비된 제도를 뒷받침하고, 사각지대를 줄이는 실질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늘어나는 보복범죄…‘두 번 우는’ 피해자들= 법조계와 학계, 시민사회 등에 따르면 열악했던 국내 범죄피해자 지원 제도는 지난 10년 동안 선진국 수준 정도로 체계를 갖춰왔다.

일선 경찰서마다 범죄피해자들의 초기상담을 전담하는 ‘피해자 전담 경찰관’이 배치됐고, 강력범죄에 대해서는 별도로 피해자심리전문요원(CARE)의 상담을 받도록 하고 있다. 또한 범죄피해자들의 숙박이나 교통비 등 기본적인 편의도 제공한다. 범죄 피해자나 신고자의 신상정보가 노출되는 것을 막는 가명(假名)조서의 경우 검찰이 내부 지침을 마련한 지 1년만에 두 배 가까이 증가하기도 했다.

사법당국이 지난 몇 년 동안 추진한 ‘범죄피해자 권리 및 지원제도 고지 의무제도’의 경우 16일로 시행 석달을 맞는다. 이용우 범죄피해자지원중앙센터 이사장은 “예전처럼 수사기관에서 피해자를 방치한다는가 하는 경우는 많이 사라졌고 오히려 과거 제도의 혜택을 받지 못했던 피해자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 알릴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범죄피해자들의 ‘사각지대’는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대표적으로 보복범죄가 꼽힌다. 이병석 새누리당 의원이 대법원과 법무부로부터 제출 받은 자료를 분석한 결과 지난 2006년 75건이던 보복범죄 수는 2013년 396건으로 5배 가까이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2014년 상반기에도 196건이 발생했다.

특히 보복범죄 중 70%는 수사 초기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가해자가 석방되거나 피의자 조사를 마친 직후에 무방비인 피해자들을 찾아가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가 주를 이뤘다.

피해자의 신상정보가 담긴 영장 범죄사실을 그대로 사본으로 첨부해 피의자에게 통지하는 기존 관행이나, 범죄피해자의 신상정보 중요성에 대한 사법당국의 무관심이 화를 키운다는 지적도 있다. 지난해 광주지방법원은 성폭력 피해자의 이름ㆍ주소ㆍ주민등록번호 등을 기재한 판결문을 가해자에게 송부해 논란을 빚기도 했다.

▶ 수사현장 피해자 무관심...피해자 구제 고지 적응중= 수사현장의 열악한 환경도 범죄피해자를 상처받게 하는 또다른 요인으로 지적된다.

대전지방경찰청 청문감사관실이 수사부서 직원 22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1.6%가 범죄피해자와 관련 ‘무관심’을 가장 먼저 개선해야 할 사항으로 꼽았다. 적은 인력으로 범인을 잡는 일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피해자들의 인권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으로 분석된다. 다음으로 20.4%는 ‘위압적ㆍ불친절 태도’를 지적했고 ‘의사소통 기술부족’(9.7%), ‘편파수사’(7.1%) 등이 뒤를 이었다.

석달전부터 시행키로 한 ‘범죄피해자 권리 및 지원제도 고지 의무제도’는 가해자에게 행하는 ‘미란다 원칙’과 대응하는 개념인데, 아직 일선 실무에서는 급박한 사건 처리과정에서 즉시 고시하지 못하고 뒤늦게 알려주는 경우가 가끔 있다고 한다.

외국인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범죄피해자보호법 제 23조는 해당 국가 간 상호보증이 있는 외국인들이 제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 국가 대부분은 한국과 상호보증을 체결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 범죄피해가 발생할 경우 별다른 보상을 받을 수 없다.

불법체류자의 경우 범죄피해자가 됐을 때 ‘통보의무면제 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리부터 강제퇴거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신고를 못하는 경우가 늘어나는 실정이다.

▶처벌-회복-개과천선 3요소 충족시키는 대안을= 전문가들은 피해자 인권보호의 핵심 축은 ▷범죄자의 처벌 ▷원상회복이나 피해배상 ▷범죄자의 개과천선 후 사회복귀 등 세가지 모두 충족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를 위해 ▷증인 심문 등 제한적으로 이뤄지는 피해자의 법정 참관 및 진술권 강화, ▷수사기록에 대한 전면적인 열람과 등사권, ▷현재 성폭력 사건에 국한돼 있는 피해자 전문 국선변호인 확대, ▷검사 재량에 맡겨져 있는 공소제기 과정에서의 피해자측 의견 반영 확대, ▷가해자에 의한 보복행위 차단과 경제곤란 극복, 심리치료를 위한 관련 기관의 공조 확대 등 조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아울러, 기존에 도입된 범죄피해자 지원ㆍ보호 제도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부서 간 업무 중복을 최소화하고 예산과 전문성 확보 등에 주력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류경희 경찰교육원 담임교수는 “범죄 피해를 당한 직후 겪게 되는 신체적ㆍ정신적ㆍ경제적 피해들이 적절하게 복구되지 않는다면 피해로 인한 분노와 절망감 등 부정적 감정들이 더욱 증폭될 것”이라며 효과적인 제도 활성화를 위해 ▷피해자 전담부서 기능 강화 ▷전담경찰관 전문성 확보 ▷관련 법령ㆍ예산 확보 ▷피해자 지원 유기적 네트워크 구축 등을 제시했다.

범죄자와 피해자에게 들어가는 예산 불균형도 풀어야 할 숙제다. 법무부에 따르면 지난 5년간 조성된 범죄피해자보호기금은 2011년 623억원, 2012년 632억원, 2013년 684억원, 2014년 594억원이다. 반면 범죄자의 재판ㆍ수용ㆍ교화 등을 위해 투입되는 국가 예산은 연평균 3조원 가량으로 범죄피해자보호기금에 비해 무려 50배 가까이 사용되고 있다.

피해자 지원제도 악용에 대한 방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인권시민단체 관계자는 “지하철 성추행의 경우 하루에도 수십 수백건이 일어나는데 (피해자 지원을 받기 위해) 허위로 신고하는 경우도 있다”며 “명확한 기준을 정해서 정말로 억울한 피해자를 가려내는 일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bigroot@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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