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인터뷰] 조상구 “1400편 외화번역? 난 그 영화 속에 살고 싶었다”
엔터테인먼트| 2015-07-29 08:20
젊은 시절의 조상구(61)는 펄떡이는 활어 같았다. 살아 움직이는 눈빛으로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종횡무진했다. ‘배우는 눈으로 말한다’는데 그 눈빛엔 도시의 음울함과 밑바닥 인생의 고단함이, 세상을 향한 독기가 가득했다.

‘청춘들의 영웅’이었던 까치(그는 죽마고우 이현세가 그린 까치의 실제모델이다)는 ‘남성들의 판타지’인 시라소니(SBS 야인시대)로 이어졌다. “까치가 10~20년이 지나 시라소니가 됐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게 배우로서의 조상구지.”

‘고독한 호랑이’의 얼굴을 담았던 조상구는 이후로도 수십편의 작품을 만났다. 사극(2007 연개소문, 2010 ‘김수로’, 2012 ‘무신’)과 현대극을 아울렀다. ‘식객’(2008), ‘타짜’(2008), ‘태양을 삼켜라’(2009), ‘마이더스’(2011), ‘트라이앵글’(2013)에서 존재감은 발했다.

“시라소니 이후로 글쎄 뭐. 보여줄 만한 걸 보여준 적이 없네요.” 스스로는 그렇게 말한다. 그게 조상구의 방식이다.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던 초복날, 때마침 ‘징비록’(KBS1)의 촬영 스케줄이 비었다. 서울 청담동의 한 복집에서 그를 만났다. “우리 마누라도 사줘야 하는데. 나만 먹으니 미안한데…” 36년간 배우이고, 19년간 대한민국 최고의 외화번역가였던 삶, 그리고 한 가정의 가정으로서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조상구ㆍ시라소니ㆍ마에다…배우로의 삶=어린 그에게 “영화는 신앙”이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생후 6개월 때부터 영화관을 드나들며 하루에 한 편씩 영화를 봤다. 너댓살 살 무렵엔 극장에 가지 않으면 못 견딜 지경이었다고 한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배우가 꿈이었어요. 영화를 보면 난 이미 그 세계에 들어가있는 사람이었어요.” 동국대 영어영문과를 재학한 것도 “빨리 할리우드에 가고 싶었던” 탓이다.

학창시절엔 언제나 주인공으로 살았던 그는 배우의 길로 접어들며 가시밭길을 걸었다. 1979년 영화 ‘병태와 영자’로 데뷔했지만 얼굴을 알리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물여섯에 아내와 결혼하고 극단 생활을 하는 동안 조상구는 7년간 앓아누웠다. 극단에서만 4명이 앓았다는 흔하디 흔한 폐병이었다. 벌이도 시원치 않은데 병까지 앓으니 생계는 아내가 책임졌다. “별도 따다주겠다”며 자신만만했던 청년은 “돈 1000원이 없어 쌀 떨어질” 걱정을 했다. 달동네 지하에서 누워있는 동안 조상구는 34kg이나 체중이 줄었다. 배우의 삶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7년 만에 찾아온 작품에서 조상구는 지금의 이름을 만나게 됐다. 그의 본명은 최재현이다. “현세 때문이죠. 그 땐 만화가 영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별들의 고향’을 만든 이장호 감독이 영화로 만든대. 원작료도 500만원을 준대. ‘와, 이 새X 출세했네’ 그랬죠.”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의 오디션 소식을 듣고 조상구는 죽마고우이자 영화의 원작자인 이현세에게 자신을 추천하라고 옆구리를 찔렀다. “현세가 없었으면 될 수 없었죠. 울며 겨자먹기로 나를 쓴거야.”

영화에서 그는 손가락 부상으로 마동탁의 피칭머신을 해주는 ‘비운의 투수’ 조상구를 연기였다. 연습장에 찾아온 아들과 친구들 앞에서 마동탁으로부터 온갖 모욕을 당한다. 외인구단에 합류하며 마동탁을 상대로 아들이 보는 앞에서 인생 역전 스토리를 쓴다.

“내 처지랑 참 닮았더라고. 우리 아들은 내가 배우라는 걸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친구들이 너네 아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해도 말하지 않더라고.” 아빠의 마음으로 연기했던 조상구를 만난 이후 ‘외인구단’ 속 캐릭터는 그를 부르는 이름이 됐다.

이듬해 ‘지옥의 링’으로 첫 주연을 맡았고, ‘회색도시’(1989)를 통해 직업인으로서의 연기자의 삶에 조금 더 깊이 들어섰다. 캐릭터는 조직폭력배였으나 고뇌와 상처를 안고 의리를 지키는 한 남자의 삶을 만들어내며 배우의 세계에 흠뻑 젖어들었다. “그 이후 영화는 좋아서 선택한 게 거의 없어요. 깡패, 조폭만 했죠. ‘영웅본색’ 흉내도 내고. 그런 건 내가 하면서도 이상해요.”

2002년 ‘야인시대’ 속 시라소니는 조상구의 치열한 연구가 만든 결과물이었다. “지금까지 봐왔던 시라소니를 다 무시하겠다고 했죠. 올빽 대신 헝크러진 머리를 했고, 양복 대신 전투복을 입었어요. 이북사투리를 쓰고, 수염을 길러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조상구가 만든 시라소니는 별나게 인상적이었다. 주인공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만나 대결을 벌일 듯한 장면에선 시청률 폭등의 전설을 썼다.

36년째 이 길을 걷지만 조상구는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기 위해 들이는 공은 한결같다. ‘징비록’의 마에다 토시이에를 만들기 위해 일본영화 100여편을 찾아봤다. 뒤늦게 투입됐기에, 앞서 자리잡은 배우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한다는 판단이었다. 악을 쓰고, 살기에 휩싸인 일본장수들 틈에서 조상구는 차분히 목소리를 낮춘다. 인상도 쓰지 않는다. “얼굴의 주표정, 목소리 톤을 먼저 정해야 캐릭터가 쉽게 잡혀요. 다행히 내가 후비고 들어갈 틈이 있었죠. 저로서는 기회였어요. 편안한 모습으로도 강함을 보여줄 수 있던 건 처음이었죠. 집사람도 좋아해.”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1400여편의 ‘자수와의 전쟁’…번역가의 삶=인생에 남을 만한 작품을 몇 편 만났다고 생계가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조상구는 “먹고 살기 위해” 번역일을 시작했다. 1987년 비디오 데크가 출시되며 미개봉 외화가 비디오로 물 밀듯이 쏟아지던 때였고, 영화 ‘회색도시’를 촬영할 당시였다.

“‘회색도시’ 조감독이 영화대본을 놓고 번역하고 있더라고. 깜짝 놀랐지. 아니 영어를 그렇게 잘해? 영어 못 해도 된다는 거야. 비디오 한 편당 3만원을 준다네. 한 달에 스무 편을 번역하면 60만원이잖아.”

번역가들이 구사하는 테크닉은 100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비디오 번역은 한 줄에 열두자씩, 위아래로 스물네 자에 장면을 담아낸다. 영화는 더 짧다. 한 줄에 일곱 자, 위아래 두 줄이 들어가 14자로 승부를 본다. “접속사와 동사, 부사의 사용에 따라 캐릭터가 전혀 달라져. 띄어쓰기까지 들어가면 기껏해야 열두 자에서 끝내야지. 얼마나 맛있게 한 자 한 자를 줄이냐가 관건이죠.”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그가 번역한 영화는 무려 1400여편, ‘레옹’, ‘LA컨피덴셜’, ‘타이타닉’, ‘피아니스트’, ‘밀리언달러베이비’, ‘무간도’, ‘로미오와 줄리엣’, ‘크루서블’, ‘제5원소’ 등 대한민국을 강타한 블록버스터는 물론 예술영화, 홍콩영화 할 것 없이 조상구, 아니 최재현의 손을 거쳤다. 익숙치 않았던 번역가로의 초반 삶을 지나 평균 이틀에 한 편씩 비디오를, 한 달에 너댓편의 영화를 옮기며 ‘자수와의 전쟁’을 벌이던 그는 업계에선 너나없이 찾는 일등 번역가가 됐다. 영화 한 편에 20만원으로 시작했던 번역료는 ‘타이타닉’에서 250만원으로 뛰었다.

누구라도 울리고 웃길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 이제 2분 뒤에 울게 될거야. 관객을 가지고 노는 작업이었죠.” 그만큼 교만했다고 한창 때의 그를 돌아본다.

그런 조상구에게도 혀를 내두르게 한 작품들이 있다.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크루서블’(1996)과 시고니 위버의 ‘진실’(데쓰 앤 메이든)이다. “아무리 훌륭한 시나리오라도 불필요한 말들이 있다. 번역가는 그걸 찾아낸다”는데, ‘크루서블’은 조상구에게 번역가로서 오만함을 버리게 한 작품이었다. “조사 하나를 못 줄이겠더라고. 한 문장에서 접속사 하나를 뺄 수가 없었어요. 이런 작가가 있구나. 원작자를 찾아보니, 그 옛날에 썼던 것을 그대로 썼다라고. 아서 밀러였어. 역시 대가는 다르구나 싶었죠.”

조상구는 그 시절 번역가 이미도와 업계를 양분했다. 번역가 김은주와 더불어 이 세 사람을 대한민국 3대 번역가라고 부른다.

“19년동안 나를 먹여살린 분신같은 존재였는데, 전 번역이 싫었어요. 내가 하고 싶은 건 이게 아닌데, 난 저 안에 들어가고 싶은 건데 번역을 하고 있는 내 꼬라지가 얼마나 비참해. 고문이나 마찬가지였죠.”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결국은 가족”…인간 조상구의 삶 =배우는 한 때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삶이었으나, 지금 그에겐 가족이 첫 번째다. “가족이 아니라면 배우를 할 이유도 없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당신, 겁이라는 말 알아요? 하늘에서 쫓겨내려온 선녀가 태산같은 바위를 치맛자락으로 쓸어내리는 벌을 받아요. 선녀의 치맛자락으로 쓸어서 바위를 가리는게 한 겁, 그걸 천 번을 한 것이 천겁이야. 우린 그런 인연으로 만난거야.”

투병 중인 남편을 묵묵히 지키며 여전히 같은 곳을 바라보는 아내는 조상구에게 “우린 천 겁의 인연으로 만났다”고 말한다. 갈등도 있었지만 건강하게 잘 자라준 두 아들은 그의 원동력이다. 
사진=박현구 기자/phko@heraldcorp.com

사실 조상구에게 배우로서의 전환점은 이미 20년 전 찾아왔다. “나른한 봄날이었어. 강변북로를 달리는데 눈물이 그렇게 나더라고. 아무 이유도 없었어요. 그 때 깨달음처럼 왔어요. 내가 배우가 되려고 했던 건, 내 식구들을 편하게 먹여살리기 위해 달려온 과정이고 수단이었구나. 아마 마흔셋, 마흔넷 정도였어요.” 그 날 이후 조상구는 “독기와 음울함이 사라졌다”는 말을 주로 들었다. 그러면서 편안해졌다고 한다. 가족의 의미를 더 깊이 생각한 때였다. “이 사람들, 내 아내와 아이들이 웃으면 나도 웃고, 아프면 나도 이렇게 아픈데. 나의 희노애락은 내 아이들의 희노애락과 같이 하더라고.”

조상구의 이야기의 끝엔 늘 가족이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잊기 위해 해병대에 지원했고, 가장이 된 후엔 아내와 두 아들에게로 시선이 쏠려있다. “가족은 늘 그렇게 독특하게 남아있다”며 “내겐 결국 가족이구나.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느낀다”고 한다.“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본 적은 없다. 대신 사랑을 담은 눈빛으로,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으로 마음을 전한다.

“배우? 배우는 현실에서 그냥 영화배우로 사는 거야. 항상 꿈꾸며 살아가니까 그게 배우지. 막상 일에 들어가면 평범한 직업인이죠. 어떤 배우로 남고 싶다는 건 없어요. 우리 아내, 두 아들이 괜찮은 배우였다고 생각해준다면 그걸로 좋아요. 근데 그게 객관성은 있어야지. 조상구가 누구야? 이러면 안되잖아.”

고승희 기자/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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