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지난해 회사의 렌즈 제작도면, 신제품 개발계획 등 중요 문서를 외장 하드디스크에 담은 뒤 12년간 몸 담았던 회사를 떠났다.
김씨는 곧바로 A사의 유럽 총판업자였던 H(37ㆍ폴란드 국적)씨로부터 33억원을 투자받아 역시 카메라 렌즈를 만드는 B회사를 설립했다.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 기술 개발은 B사에게 필요가 없었다. 핵심 기술을 A사에서 빼왔기 때문이다.
김씨는 전 회사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에 서류상으로만 이름을 올려 위장 취업을 하는 등 치밀했다.
공장이 지어지고 일이 술술 풀리자 김씨는 내친김에 A사에 함께 근무하던 핵심 인력들을 하나하나 스카웃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역시 A사를 그만두고 나오면서 영업비밀을 빼돌렸고, 거리낌 없이 B사 제품 개발 과정에 사용했다.
자본금을 투자한 사장 H씨도 김씨가 알려준 정보로 A사 내부망에 접속해 신제품 개발 계획 등의 파일을 다운로드했다.
제품이 완성되면 순식간에 유럽에서 큰 매출을 올릴 생각에 들떠 있던 김씨. 하지만 치밀했던 범죄는 김씨가 A사에서 사용했던 노트북 때문에 발각됐다.
김씨가 노트북을 반납하며 이메일 계정의 자동 로그인 기능을 해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노트북을 물려받은 A사의 직원은 자동 로그인된 김씨의 메일 계정을 둘러보다 수상한 메일이 눈에 띄자 회사에 알렸고 김씨의 범행은 허무하게 끝이났다.
서울지방경찰청 국제범죄수사대는 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김씨를 구속하고 A사의 전 직원 6명 등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4일 밝혔다. 폴란드인 H씨는 지명수배됐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이 A사로부터 유출한 파일은 수만건에 달하고, 이 가운데 제작도면 등 영업비밀로 볼 수 있는 것만 278건에 달했다.
핵심 기술 유출로 인한 A사의 경제적 피해는 약 7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기업의 영업비밀을 빼돌리는 산업스파이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국내 굴지의 자동차기업도 신차 설계 도면 등 영업비밀 유출로 수백억대 피해를 보기도 했다.
경찰 관계자는 “회사가 영업비밀 문서 파일에 대해 ‘합리적’ 수준에서 보안 관리 노력을 해야만 유출시 부정경쟁방지법상 영업비밀로 인정 받을 수 있다”며 “일단 유출이 되면 증거 인멸도 쉽고 혐의 입증이 쉽지 않기 때문에 기업들이 산업 보안에 대한 의식을 높이고 철저한 관리를 해야한다”고 당부했다.
전문가들도 법망을 빠져나가는 산업스파이 범죄에 대해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창무 중앙대 산업보안학과 교수는 “산업기술 등 영업비밀 유출로 기대하는 이익이, 적발돼서 처벌로 이어질 가능성에 비해 훨씬 크기 때문에 유출이 끊이지 않고 있다”며 “전문 수사 인력 양성 뿐 아니라 관련 법령을 실효성 있게 개정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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