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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의 그늘] ‘손님은 왕’이 만들어낸 감정노동의 그늘
뉴스종합| 2015-10-15 12:45
[헤럴드경제=이지웅 기자] 손님을 왕처럼 떠받드는 우리나라 서비스업계 특유의 문화는 노동자들을 감정노동에 신음하게 만드는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전직 모 은행 텔러로 5년간 근무한 이모(33ㆍ여)씨는 “주어진 절차 등을 무시하고 친분이 있으니 편법으로 처리해달라는 요구가 다반사였다”고 말했다.

신분증이 필요한 절차에서도 당장 해달라고 떼를 쓰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우리나라에서 감정노동 스트레스가 큰 것은 손님을 왕처럼 떠받드는 특유의 서비스업 문화가 큰 몫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사진은 일부 고객의 불쾌한 요구와 언행에도 불구하고 웃으면서 응대해야 하는 국내 한 콜센터 사무실 전경.
[사진=헤럴드DB]

그렇게 해줬다가 고객이 뒤늦게 찾아와 “내가 말한 건 이게 아니”라며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이씨는 “인상을 구기지 않고 응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엄청났다”고 말했다.

서울의 한 백화점 화장품 코너에서 일하는 A(23ㆍ여)씨는 “급한 약속이 있다며 풀 메이크업 받고, 제품을 사간 다음 며칠 뒤에 환불하러 오는 손님도 적지 않다”고 했다.

또 샘플 하나에 소리를 지르는 고객, 제품을 거의 다 쓰고 가져와서는 “명품이면 명품답게 처리하라”는 등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경우도 흔하다.

A씨는 “그런 일을 겪을 때면 유니폼을 벗어던지고 한 마디 하고 싶지만 결코 그럴 수가 없다. 나쁜 감정을 숨기고 얼굴에는 미소를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 통신사 콜센터 상담사 B(36)씨도 얼굴도 모르는 고객에게 시달리는 일은 잘 익숙해지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어떤 요구가 아닌 그냥 불만 전화를 하는 분들이 꽤 있어요. 그러면 죄송하다고 마무리를 하고 전화를 끊는데, 이번엔 전화를 끊었다고 3시간 넘게 실랑이를 한 적도 있습니다.”

한 휴대폰 업체 상담원 역시 “계속 상급자와의 면담을 요구해 하루 종일 몇 명의 직원이 한 고객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도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 노동자이긴 마찬가지다.

경기 지역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 박모(37ㆍ여)씨는 “새벽 응급실에서 일하면 술취한 사람이 밀치거나 삿대질하는 경우도 하루에 한 번은 겪게 된다”고 했다. 그럴 때면 뒤돌아 혼잣말을 하고 삭힌다.

병원 보안 요원이 있긴 하지만 직접적 위협이 있어야 개입을 하지 은근히 시비를 거는 경우에는 간호사가 다 감당해야 한다.

물리치료를 담당하는 간호사는 “맨살에 마사지를 하고 기기를 몸에 부착을 할 때 빤히 쳐다보면서 이상한 미소를 짓는 사람이 있다”며 “그럴 때도 아무런 표현을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각계에서 감정노동 스트레스를 호소하지만, 대부분 업체는 고객의 무리한 요구나 불쾌한 언행 등에 대한 대응을 직원에게 전적으로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또 관련 규제를 마련해 직원을 보호하자는 요구에도 대체로 미온적이다.

지난 12일 KB국민카드는 콜센터 상담 직원에게 욕설을 퍼붓고 성적 모욕감을 준 회원 D씨를 서울 종로경찰서에 형사고발했다. 하지만 이처럼 기업이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는 사례는 많지 않다.

plato@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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