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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권의 함정] 실종되는 고액권…범죄자에 만능키?
헤럴드경제| 2016-02-18 11:48
5만원권 지난해 1억6000만장 회수
美 100달러지폐 환수율도 75%불과
500유로·英 50파운드권도 마찬가지
고액권 테러·범죄조직의 자금줄



직장인 김모(36) 씨는 설날 고향에 내려가 할머니에게 용돈으로 5만원권 몇 장을 드렸다가 도리어 ‘센스 없다’는 꾸중만 들었다. 시골에서 5만원권을 어디다 내고 쓸 수 있겠느냐는 것. 생각해 보니 자신도 5만원권을 내고 물건을 사 본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편리하다는 이유로 5만원권이 도입된 지 7년이 지났지만 실생활에서 사용되는 일은 드물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4억장이 넘는 5만원권을 찍어냈지만, 1억6000만장만 회수됐다. 어디론가 스며들어간 뒤 돌지 않고 있는 셈이다.  

다른 나라의 고액권 역시 마찬가지. 500유로권(68만5000원)의 경우 ‘빈 라덴’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오사마 빈라덴이 사망했을 당시 품 안에 있어서라는 유래도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뜻에서 붙었다는 설명도 있다. 미화 100달러권(12만2000원)은 발행된 지 100년이 넘게 지났지만 미국 현지에서는 받아주지 않는 상점이 많다. 위조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밖에 영국 50파운드권(8만8000원), 스위스 1000프랑권(123만4000원)도 사정은 같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미국의 100달러 지폐의 환수율은 2013년 82%에 달했지만 2014년에는 75.3%로 뚝 떨어졌다. 500유로 역시 2013년 102.1%에서 88.7%까지 떨어졌다.  우리나라 5만권 실종은 이 보다 더 심각하다. 미국이나 유로존의 3분의 1수준에 불과하다. 지난해 5만원권의 환수율은 40.1%(8조2500억 원)에 그쳤다. 그나마 2014년 25.8%에서 크게 높아진 수치다. 지난해 1만원권의 회수율이 105%에 달했던 것에 비해서도 큰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들 고액권이 무척이나 활발하게 애용되는 곳이 있다. 바로 범죄다. 전문가들은 오래전부터 고액권이 뇌물, 탈세, 마약 밀매, 테러 등의 범죄에 이용된다고 주장해 왔다. ‘비타500’ 한 상자에 1억원이 넘는 돈이 쏙 들어갈 만큼 적은 부피와 무게만으로 거액의 자금을 옮길 수 있는 데다, 돈이 흘러간 경로를 추적당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피터 샌즈 전 스탠다드차타드 은행장은 지난 8일 낸 리포트에서 “고액권은 부유한 국가에서는 세금 탈루와 마약 밀매, 돈세탁에 이용되고, 가난한 나라에서는 엘리트 부패와 모든 종류의 범죄, 세금 탈루를 일으킨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러면서 “100만유로(약 14억원)는 500유로짜리로 바꾸면 작은 핸드백에 들어간다”며 “100만파운드(약 18억원)는 서류가방 두개만 있으면 된다”고 덧붙였다.

가장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범죄는 위조. 미국은 2013년 말 위조 방지 장치를 강화한 100달러화 신권을 발행했지만, 여전히 위조는 성행하고 있다. 악명 높은 북한의 슈퍼노트(위조 100달러권)처럼 조직적인 범죄 외에도, 개인적인 위조 행위가 며칠이 머다하고 발생하고 있다. 한국 역시 지난 한 해 동안 발견된 위조지폐 3000여장 가운데 2040장이 5만원권으로 가장 많다.


세금 탈루 역시 심각한 문제다. 미국 국세청에 따르면 2006년을 기준으로 탈루된 세금은 3850억달러에 달한다. 이는 그 해 미국 재정적자의 2500억달러보다 1.5배나 많다. 세금만 잘 걷었어도 재정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에드가 페이지라는 경제학자는 2011년 미국 정부가 한 해 5000억 달러의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스닥은 이 중 고액권으로 인한 탈세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당 부분 기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최근 가장 주목받고 있는 것은 테러 및 범죄조직의 자금줄이 되고 있다는 것. 2010년 영국 중대조직범죄수사국(SOCA)은 영국에서 발행되는 500유로권의 90%가 갱단이나 다른 범죄조직으로 흘러들어 간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EU 집행위원회는 얼마 전 고액권 유로화나 가상화폐 등이 범죄에 쓰일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고액권의 흐름을 추적 조사하기로 했다. 500유로만 있으면 담뱃값 1갑에 무려 2만달러(약 2450만원)까지 꼬깃꼬깃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고액권의 부작용이 부각되자 각지에서 이를 퇴출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지난 12일 유로존 재무장관들은 테러리스트들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해 유럽중앙은행(ECB)에 500유로권 폐지를 검토해달라고 요청했고, 마리오 드라기 총재는 15일 유럽의회에서 가진 연설에서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이어 16일에는 로렌스 서머스 전 미국 재무장관이 “미국도 100달러 지폐를 없애야 할 때”라는 칼럼을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해 달러화 고액권까지 대상으로 삼았다. 피터 샌즈 은행장은 앞서 언급한 보고서에서 “고액권은 신용카드, 전자 결제 등이 있는 현대 경제에서는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그것은 합법적인 경제에서는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지만 지하경제에서는 중대한 역할을 한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대해 미국 재무부는 홈페이지를 통해 “현재 사용중인 화폐를 바꿀 계획이 없다”고 밝힌 상태다.

김성훈 기자/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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