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민태원은 그의 수필 ‘청춘예찬’에서 “청춘, 이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만 ‘삼포세대(연애ㆍ결혼ㆍ출산을 포기한 세대)’와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등의 단어를 등에 업은 오늘날의 청춘은 그렇지가 못하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청춘, 이는 듣기만 해도 가슴 답답한 말”이 돼 버렸다. 겨우 청춘의 고비를 넘겨도 답답증은 가시지 않는다. 백세시대, 인생 절반이 지나기도 전에 ‘삼팔선(38세 퇴직)’, ‘사오정(45세 정년)’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 앞에서 또 다시 캄캄하다. 이쯤이면 오래 산다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수 도 있겠다는 말이 턱밑까지 차오른다.
‘오래,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론에서 한 가지 정답은 없다. 그러나 이 질문에 “최고의 노후대비는 ‘영원한 현역’을 꿈꾸며 오래 일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바로 강창희(69)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대표다. 그는 아직도 연간 300회에 달하는 생애설계 투자교육을 진행하면서 자신의 철학을 직접 실천에 옮기고 있다.
모두가 닮고 싶어하는 소위 ‘좀 살아온 선배’의 말은 공감을 얻는다. 시쳇말로 “넌 늙어봤니? 난 젊어봤어” 이 논리가 ‘생애설계 노하우’를 전파하는 그의 투자 교육 현장에서는 빛을 발하는 셈이다. 여전히 금융투자업계 후배들의 ‘롤 모델’로 회자되며 모두가 꿈꾸는 ‘영원한 현역’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비결을 직접 들어봤다.
▶꿈과 기회를 한정 짓지 않는다=“직접 부딪혀보면, 자신이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더욱 분명해 집니다. 꿈과 미래를 함부로 단정짓지 마세요.”
강 대표의 학창시절, 당시 국가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농업경제를 이끄는 젊은 일꾼이 돼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서울대 농경제학과에 입학했다.
군대를 다녀와 복학생이 됐을 때, 대학을 나온 삼촌들이 취업을 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봤다. 1973년 1차 오일쇼크를 전후해 국가 경제도 휘청이던 때였다.
“시골에서는 소 팔아서 자식 대학 보내던 시절이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도 놀고 먹게 될 까봐 덜컥 겁이 났어요. 그래서 농업과 관련되면서도 취직이 잘 될 수 있는 분야가 뭘까 고민을 하다가 농협에 들어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학교에서 우연히 증권거래소 신입직원을 뽑는다는 모집 공고를 본 것도 그 무렵이었다. ‘전공 상관 없음’이라는 공고문 글귀에 “어디 한번?” 하고 원서를 냈던 것이 강 대표의 인생을 바꾸는 선택이 됐다.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 취직이 돼 여차하면 다른 회사에 원서를 넣어볼 수도 있었지만 분위기 상 그럴 수가 없었다.
여전히 취업에 고군분투하는 친구들의 경쟁자로 나설 수 없었고 당시 국가 정책이 ‘우리나라도 증권시장을 육성해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어 전망도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농업 경제인을 꿈꾸던 강 대표는 농협 입사시험을 준비하던 도중 그렇게 ‘우연인듯 운명처럼’ 막 태동기에 접어든 한국 자본시장 한 가운데 발을 들이게 된다.
“꿈을 향해 달려가더라도 ‘오로지 이것만’이라고 단정하거나 거기에만 매몰되기 보다는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는 것을 그 때 배웠죠.”그는 꿈을 좇되 주변에 다가온 또 다른 기회를 알아보는 ‘열린 마음’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백세시대. ‘오래, 그리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에 대해 강창희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대표는 “최고의 노후대비는 영원한 현역으로 오래 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칠순이 다 된 지금도 연간 300회에 달하는 강연을 하며 현장을 누비고 있다. 이상섭 기자/ babtong@heraldcorp.com |
▶일본통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지금이야 전산 시스템을 통해 주식 매도와 매수가 이뤄지지만 1970년대 초 만 하더라도 주식 매도와 매수 현황을 일일이 색깔 종이로 나눠 표시해놓고 수기로 합을 맞춰 봐야 했다.
대학 졸업생보다는 여상을 나와 암산과 주판에 능한 여직원들의 진가가 업무에서 더욱 빛을 발했던 그런 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김용갑 증권거래소 이사장은 “우리나라 자본시장이 제대로 구축되려면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면서 연수생을 뽑아 해외로 교육을 보내기 시작했다. 증권거래소에 입사한 이듬해에 강 대표에게 일본 동경 증권거래소로 연수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그 이전까지는 해외 연수생으로 뽑히려면 입사 5년 이상에 어학이 능통해야 했지만, 그 해에는 연수조건이 ‘입사 후 6개월 이상, 어학실력 상관없음’으로 완화가 됐어요. 신입직원을 염두에 둔 공고라는 판단에 원서를 냈지요.”
이 선택은 그 이후 강 대표가 금융투자업계에서 소위 ‘일본통’으로 승승장구하는 시발점이 됐다. 국내에서 일본어 교육을 받은 뒤 1975년 8월, 5명의 연수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그는 한 달간 일본 동경 증권거래소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어렴풋이 업계에서 ‘일본 전문가’가 된다면 차별화 포인트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국내에 돌아와서도 일본어 공부를 지속한다. 그러던 중 강 대표는 1977년 4월, 당시 대우증권에서 경력사원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증권거래소를 나와 대우증권 국제조사부로 이직한다. 그리고 이듬해 또 한번 두 달간의 일본 연수 기회를 갖는다.
“1980년이 우리나라가 마이너스 5%대로 역성장한 해였습니다. 증권시장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았고 그럴수록 선진 금융시스템을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두 번의 단기 연수를 경험한 그는 이번에는 자비를 들어 일본에 공부를 하러 가겠다고 회사에 뜻을 밝혔다. 당시 대우증권은 휴직 대신 ‘파견’ 형식을 권유했고, 강 대표는 이를 받아들여 일본 대학원에 연구원 신분으로 갈 수 있었다.
1년을 계획하고 갔지만 1981년 2월 정부가 ‘자본 자유화를 위한 자본시장 국제화 장기계획’을 발표하면서 많은 증권사에서 국제부를 신설하는 전환기를 맞는다. 대우증권은 이 흐름을 타 업계에서 처음으로 해외 사무소를 개설하게 되는데 자연스레 파견을 나가있던 강 대표가 ‘동경사무소’ 소장을 맡게 된다.
그렇게 1984년 8월부터 1989년 2월까지 대우증권 동경사무소 소장으로 재직하며 그는 일본 전문가로 잔뼈를 키운다. 1998년 현대투신운용 사장으로 자리를 옮길 때까지 21년을 대우증권에서 일하며 일본통으로 승승장구 했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의 중요성=현대투신운용 사장으로 2년간 근무하고 굿모닝투신운용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강 대표는 ‘자산운용’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펀드 비즈니스’가 성공하려면 운용만 잘 해서 되는 게 아니라 투자자들이 투자 원칙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이는 2004년, 당시 57세였던 그가 또 다른 도전을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강 대표는 박현주 미래에셋금융그룹 회장에게 ‘제안서’를 보내 본인이 생각한 ‘투자교육’에 대한 철학을 설명하면서 성장하고 있는 미래에셋금융그룹에 투자교육연구소가 필요하다고 어필했다.
“박현주 회장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그 동안 제가 해온 일과 앞으로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에 대해 미리 제안서를 보냈어요. 그리고 2주후에 박 회장을 만났을 때는 이미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로 결정을 하신 후 였지요.”그는 박현주 회장의 빠른 추진력과 먼 미래를 내다보는 판단력을 높게 평가했다.
“투자교육 활동을 하는 동안 단 한번도 제가 하는 일을 펀드 판매 같은 실적과 연관짓지 않았어요. 투자교육의 가치를 이해하고 그것을 영업에 이용하지 않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는 측면만 봐도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브랜드 가치에 대한 인식이 확실히 있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강 대표는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를 이해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와 퇴직연금연구소 소장을 겸임하며 미래에셋금융그룹의 부회장으로 9년을 일하고 그는 2012년 스스로 부회장 직을 내려놨다. 후배들의 앞길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또 다른 현장에서도 충분히 자신의 역할이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2014년 “투자형 연금에 대한 이해와 투자 철학을 고객들과 나누는 것이 장기적으로 좋을 것 같다”는 황성택 트러스톤자산운용 사장의 제안에 공감하고 이를 받아들여 현재까지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대표를 맡아오고 있다.
그는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투자교육의 중요성과 인문학적 소양을 토대로 한 생애설계를 통해 ‘행복한 노후’를 맞을 수 있다는 철학을 전파하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현장에 남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올해 제가 일흔이에요. 사람들이 내 나이가 칠순인데 왜 계속 부를까 생각해 봤죠. 젊은 사람이 ‘행복한 노후설계’를 얘기하는거 보다는 저 같이 퇴직도 해봤고, 자녀 결혼도 시켜본 사람의 말이 더 설득력 있다는 걸 느끼게 됐어요. 제가 이미 다 해본 고민과 솔루션을 공유하는 거니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백세시대를 맞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앞으로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황유진 기자/hyjgogo@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