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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 얼굴 바꾼다고 변하나 ②]美 지폐 앞면 장식한 ‘흑인’…그러나 ‘흑인’은 없다
뉴스종합| 2016-04-21 16:07
[헤럴드경제=이수민 기자]해리엇 터브먼. 미국 화폐 도안에 처음으로 흑인이 등장하게 됐다. 노예 출신인 터브먼은 여성의 몸으로 농장에서 탈출한 뒤 남부 지방의 다른 노예들을 북부로 탈출시키는 일을 하다가 남북전쟁에도 참전했다. 전쟁 이후에는 여성과 흑인 인권 운동을 진행했다. 단순히 흑인 유명 인사가 아니라 오늘날 흑인들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존재하게 한 영웅이다. 그가 미국 지폐의 앞면을 장식하게 됐다는 점은 미국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다.

현재의 영웅도 있다. 재선에도 성공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다. 임기 후반부 리더십을 위협하는 레임덕조차 오바마 대통령 만큼은 피해 갔다. 최근 갤럽이 실시한 임기 마지막 해 대통령 직무 수행 지지도는 51%를 기록했다. 호감도 조사에서도 현재 경선 레이스를 치르고 있는 대선주자들 모두를 앞질렀다.

그러나 아직은 ‘난 사람’의 이야기다. 특출나게 똑똑하지도, 대단한 부(富)를 갖추지도 않은 보통 흑인들은 여전히 미국 사회에서 백인과 동등한 선에 서지 못했다. 




흑인에 대한 경찰의 과잉 대응 문제는 여전히 미국사회의 고질병이다.

지난해 볼티모어 시위의 도화선이 됐던 프레디 그레이 사건이 대표적이다. 25살의 그레이는 경찰에 체포된 지 일주일 만에 척추 손상으로 사망했다. 축 처진 그레이를 경찰차로 끌고 가는 장면을 찍은 일반인의 동영상이 공개되면서 경찰은 과잉 대처로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시카고 경찰은 인종차별적 과잉대응으로 악명이 높다. 영국 가디언지에 따르면 시카고 경찰은 ‘호먼 광장’으로 알려진 비밀 심문 시설에 용의자들을 구금해 놓고, 주먹과 팔꿈치로 가격하는 것에서부터 무릎 걷어차기, 손목 비틀기, 곤봉 타격, 테이저건을 사용한 전기충격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폭력을 저질렀다. 물론 폭력의 상대는 흑인 용의자들이다. 미국 연방 법무부가 시카고 경찰의 관행과 공권력 오남용 실태를 조사하겠다고 나섰지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난 11일 시카고 경찰은 불신검문 요구에 응하지 않고 달아난 흑인 10대 피어 라우리를 사살하기도 했다.

과잉 대처에 대한 검찰, 법원 판단의 공정성도 계속해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장난감 총을 갖고 있던 12살 흑인 소년을 쏜 경찰은 최근 기소를 면했다.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NYT)는 사설을 통해 소년이 중산층 동네에서 장난감 총을 갖고 놀던 백인 소년이었다면 지금 살아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 미 듀크대와 ‘더 뉴 스쿨’(The New School) 연구진이 ‘청소년 추적 연구 자료’(National Longitudinal Survey of Youth)를 분석한 결과 부유한 흑인 아이가 가난한 백인 아이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더 높다.

생활 수준을 기준으로 해도 흑인은 절대적 약자다.

CNN머니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흑인 실업률은 8.3%를 기록했다. 2007년 9월 이후 최저치를 기록한 것이었지만 백인 실업률 4.5%, 히스패닉계 실업률 6.3%, 아시아인 실업률 4%에 비하면 확연히 높은 비율이다.

연봉 수준에서도 2014년 기준 백인 대학교 졸업생의 경우 주당 임금 중간값이 1132달러(약 137만원)였지만 흑인 졸업생의 경우 895달러(약 108만원)였다. 아시아인, 히스패닉계 졸업생들의 임금과 비교해도 더 낮다.

조직의 상부로 갈수록 흑인은 더욱 찾기 어려워진다. 포춘이 500대 기업을 선정하기 시작한 이후 이 중 흑인 CEO는 15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 현재 CEO직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은 5명이다.

문화계라고 사정은 다르지 않다. 스크린에서도 차별을 읽어낼 수 있다. 지난 2월 열린 아카데미 시상식은 백인들의 잔치라는 논란에 불을 지폈다. 2년 연속 주요 연기 분야에서 백인 배우만 후보로 선정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상자와 수상작을 결정하는 미국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위원회 회원 중 91%는 백인인 것으로 나타났다. 흑인은 3%에 불과하다.

지난 2월 미국 최대 스포츠축제인 미국프로미식축구리그(NFL) 결승 하프타임 공연에서 세계적인 팝스타 비욘세는 예고도 없던 흑인 차별을 주제로 한 공연을 펼쳐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이날 비욘세가 입고 나온 의상은 마이클 잭슨이 생전에 좋아했던 군복 패션이었고, 그의 백댄서들은 1960, 70년대 게릴라 활동을 한 흑인 인권단체 ‘흑표당’을 상징하는 검정 반바지와 배꼽티를 입었다. 이날 공개된 뮤직비디오에는 한 흑인 소년이 방탄복을 입은 경찰들 앞에서 춤을 추다가 손을 들고 멈추는 장면도 나온다. 이어 ‘우리를 쏘지 말라’는 낙서가 적힌 벽이 화면에 나타난다.

이는 단순히 뮤직비디오의 영상으로 넘어갈 게 아니라고 한다. 이게 엄연한 미국의 현실이다.


/smstor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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