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유물유적
‘대박’ 희생양 경종, 혼인신고 ‘묘현례’땐 비극 몰랐다
라이프| 2016-05-03 05:42
[헤럴드경제=함영훈기자] 경종은 어미 희빈 장옥정이 사약을 받은 뒤에야 세자가 되고, 병약한 상태에서 왕이 된 다음에도 정치 격변의 소용돌이를 견디지 못한채 요절할 수 밖에 없었던, 조선왕조 가장 불행한 임금이다.

이에 비해 무수리(하급궁녀설도 있음) 출신인 숙종의 후궁 숙빈최씨는 영조에서 순종까지 조선왕조의 마지막 일곱 임금의 조상이 되는 ‘대박’을 터뜨린다.

자연히 조선 역사의 공식 기록은 장옥정에게 불리하게 쓰여지고, 노론과 인현왕후, 영조 후세에 대한 내용은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기술될 수 밖에 없었다.

경종의 세자 시절은 ‘대박’과 ‘쪽박’의 분기점이었다. 1688년생인 경종은 만 8세 되던 해인 1696년 만 10세인 단의빈(나중에 단의왕후로 추존) 심씨와 가례를 올린다. 이 때까지만 해도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연잉군(영조)에 대한 조정 여론이 좋지 않았다. 천출 논란이 극심했기 때문이다.

빛과 그림자 처럼, 그늘에 있던 연잉군과는 달리, 경종이 세자빈을 맞는 가례와 이 사실을 종묘에 신고하는 묘현례는 축복받는 경사였다.

조상님에 대한 혼인신고식인 묘현례는 조선 역사상 경종-단의빈 커플이 처음이었다. 당시 숙종대왕과 인현왕후가 거동했고, 왕실 가족들이 함께 종묘를 방문했다. 왕실 대가족이 한꺼번에 종묘를 방문한 것은 전무후무했기에 훗날 경종으로 즉위하는 세자윤의 묘현례는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크다고 한다. 묘현례는 국가의례 중 왕실여성이 참여하는 유일한 행사이기도 하다. 당시 연적(戀敵) 장옥정 아들의 묘현례를 지켜보던 인현왕후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논하지 않는다.

묘현례를 마친 이후 행복은 잠시. 영특한 연잉군의 지략이 세자윤 입지를 압박하고, 세자의 뒷배인 이인좌의 심장을 겨냥했으며, 서서히 아버지 숙종의 마음과 조정 대신들의 기류가 연잉군 대세론으로 기운다.

다음 왕으로 지명 받고도 왕이 되지 못할수도 있다는 어린 부부의 불안감이 이어지면서, 첫 사랑 단의빈은 그만 남편의 즉위도 보지 못한채 1718년 32세의 나이로 열병이 도져 숨진다.




세자윤은 그해 13세된 선의빈 어씨와 재혼된다. 선의빈은 2년뒤 경종의 등극과 함께 왕후에 오르지만, 즉위 4년만에 남편이 의혹을 남긴채 사망하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했다.

선의빈도 남편이 죽은지 6년후, 즉 25살 되던 1730년 숨진다. 비운의 세 남녀는 정적 영조가 즉위한 지 6년만에, 모질게 버티던 경종 측근 이인좌가 처단된 지 2년만에 모두 비극을 맞는다.

스토리가 많고, 아직도 의혹이 남은 경종이 지금으로 치면 초등학교 2학년의 나이로 해맑은 웃음과 함께 대한민국 서울에 찾아온다.

문화재청(청장 나선화)과 한국문화재재단(이사장 서도식)은 오는 5~7일 세계문화유산 종묘 정전에서 ‘조선의 세자빈, 혼례를 고하다’라는 제목으로 숙종조 세자 윤의 종묘 묘현례를 재현한다.

행사는 국왕과 왕세자의 ‘신실봉심(神室奉審:신실을 차례로 살피는 의식)’을 중심으로 펼쳐지며 왕비와 세자빈의 봉심이 진행된다. 등장인물 중 왕세자와 세자빈은 대국민 사전공모를 통해 선정했다.

국왕과 왕세자는 근엄하면서도 예를 숭상한 ‘면복’을 입고, 왕비와 세자빈은 화려한 색의 ‘적의’를 입는다. 행사가 끝나면 시민들은 아직 비운을 맞지 않은 해맑은 세자 윤 부부와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문화재재단 누리집(http://www.chf.or.kr)을 찾아보면 된다. 문의 02-2270-1257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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