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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게임 갤러리]화이트채플에서 온 편지
뉴스| 2016-06-02 10:12
[헤럴드분당판교=김미라 교육부장]지난 4월 열렸던 서울 보드게임 페스타에서 한 중년 남자가 대학생들이 벌이는 게임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지난해 한국어판으로 발간된 보드게임 '화이트채플에서 온 편지'였다. 중년이 보드게임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흔치 않았으므로, 궁금증이 발동해 이유를 물었다.

"이 게임보드를 보는 순간, 어릴 때 놀던 주사위놀이판이 생각났습니다."

이재준 씨(55세)는 문득 이런 말을 내놓았다. 이 씨가 언급한 주사위놀이판은 사다리와 뱀이 등장하는 추억의 놀이판이 아니었다. 1970년대에 어린이신문 소년한국일보 1월 1일자에 두 면을 장식한 주사위놀이판을 지칭했다. 이 씨는 "당시 주사위놀이판은 전국일주, 세계일주, 우주탐험 등 매년 버전을 달리 하며 신년 아침을 기다리는 제 마음을 설레게 했다"면서 "구조대를 만날 때까지 원을 빙빙 도는 설정이라든지, 한 지점에 이르면 숫자가 남아도 무조건 멈춘 후 주사위의 홀수, 짝수 여부에 따라 진행방향이 갈리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로 주사위판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나중에 유명 만화가가 된 이원복 씨가 재미있는 삽화도 곁들였다는 설명이다.

이 씨는 "물론 화이트채플의 보드는 주사위놀이판과 다른 형태이지만, 말판으로 가득한 구성요소가 이와 비슷해 눈에 띄었다"고 말하고, "그러나 학생들이 게임하는 장면을 지켜보니 룰이 다소 복잡한 것같아 공부를 해야겠다"면서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어릴 때의 추억이 4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 연결되는 모습이었다. 그만큼 '보드게임'의 영향력이 오래 지속된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화이트채플에서 온 편지(이하 화이트채플)는 1888년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잭 더 리퍼의 연쇄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만든 보드게임이다. 이 사건은 언론사에 편지를 보내 범행을 알린 역사상 최초의 극장형 범죄였고, 수법 또한 잔혹하여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 넣었다. 이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소설, 뮤지컬, 만화 등은 셀 수 없이 쏟아졌다. 화이트채플 같은 보드게임으로도 등장했다. 가장 불행한 영혼들이 살고 있는 1888년의 화이트채플로 여행을 떠나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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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다수의 대결구도와 '보이지 않는' 살인마
화이트채플은 잭 더 리퍼의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졌던 화이트채플 빈민가를 무대로 한다. 플레이어 중 한 명은 희대의 살인마 잭 더 리퍼의 역할을 하게 된다. 잭 더 리퍼는 게임판 위의 칸 중 하나를 은신처로 정하여 게임 판 위의 희생자를 제거하고 그곳부터 은신처까지 돌아가는 행동을 반복한다. 게임판 위의 희생자 5명을 제거한 후 은신처로 도망치면 승리한다.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잭 더 리퍼를 검거하기 위한 수사관 다섯 명의 역할을 맡아 잭 더 리퍼를 직접 검거하거나 은신처로 돌아가지 못하게 막으면 승리한다.

수사관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잭 더 리퍼가 어디 있는지와 은신처가 어디인지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잭 더 리퍼는 따로 말이 없다. 잭 더 리퍼를 맡은 플레이어는 은신처의 위치와 자신의 위치를 일지에 기록한다. 게임 중 수사관들은 잭 더 리퍼가 지난 곳에 대한 단서를 얻지만 현 위치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포위망을 좁혀 은신처로 가지 못하게 막을 뿐이다.

하루의 시작은 잭 더 리퍼가 희생자를 제거하면서 시작되고 희생자의 위치가 잭 더 리퍼의 현 위치가 된다. 잭 더 리퍼가 먼저 이동하고 경찰들이 한 번씩 이동하면 한 턴이 끝난다. 정해진 턴 수 이내에 잭 더 리퍼가 은신처에 도착하면 잭 더 리퍼의 승리로 하루가 끝나고 다음 날의 살인이 시작된다. 경찰과 잭 더 리퍼의 기동력은 대동소이하지만 잭 더 리퍼는 경찰의 움직임을 훤히 볼 수 있고, 2칸 이동이나 점프 이동을 가능케 하는 아이템도 있어 일단은 경찰에게 불리하다.

대신 하루가 지날 때마다 잭 더 리퍼에게 주어지는 아이템은 줄어들고 은신처까지 돌아가야 하는 턴 수도 빡빡하게 되어 어려움이 가중된다. 특히 수사관들이 잭 더 리퍼의 은신처 위치를 대략 감 잡기 시작해 진입로를 봉쇄하면 정해진 턴 동안 잭 더 리퍼가 은신처에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2일째까지는 잭 더 리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지만, 3일째와 4일째에는 잭 더 리퍼와 수사관의 추리와 심리 대결이 멋지게 그려진다.

잭 더 리퍼와 수사관 진영이 서로 능력과 승리 조건이 다른 비대칭형 게임이므로 양쪽 중 일방이 유리하다는 논란이 나올 만하지만, 화이트채플은 양쪽 진영에 공평하게 승리 기회가 주어진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수사관들에게 더 유리한 게임을 원하거나 잭 더 리퍼에게 더 유리한 게임을 원하는 플레이어들을 위해 화이트채플에는 6종류의 추가 규칙이 있다. 이 추가 규칙은 밸런스를 맞추기 위한 장치이기도 하지만 테마에 더 몰입할 수 있는 장치이기도 하다. 특히 잭 더 리퍼 쪽의 추가 규칙은 당시 잭 더 리퍼가 언론사에 보낸 편지나 수사에 혼선을 준 거리의 낙서를 재현하고 있어 더욱 흥미롭다.

게임 룰 설명=코리아보드게임즈 박지원 과장

bp@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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