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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환 칼럼> 철학의 뜰에서 命理愛 물들다 ④
뉴스| 2016-09-30 13:13
[헤럴드경제 = G밸리 노재환 논설위원 기자]내가 처음 이 생명의 문지방을 건넜을 때의 순간을 나는 알지 못했지요. 한밤중 숲 속의 꽃봉오리와도 같이 나를 이 광대한 신비의 품속에 피어나게 한 것은 무슨 힘이었을까요.

아침에 내가 빛을 우러렀을 때 그 순간 나는 이 세상의 낯선 사람이 아님을 느꼈던 것입니다. 이름도 형태도 없는 불가해한 것이 나의 어머니 모습이 되어 나를 그 두 팔로 안았던 것이지요.

꼭 그처럼, 죽음에 있어서도 그 똑같은 미지의 것이 내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이 생명을 사랑하는 까닭에, 죽음 또한 사랑하게 될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그 오른편 젖에서 아기를 떼어낼 때 아기는 웁니다만, 바로 그다음 왼편 젖에서 그 위안을 찾아내게 마련이지요. <타고르의 ‘기탄잘리’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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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환 헤럴드경제 G밸리 논설위원

‘당신은 왜 동양철학을 선택했느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가 기억이 난다. 그럴 때마다 당황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럴 때 마다 꼭 이유가 있어야 하냐고 나는 되묻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머쓱해 한다. 물론 이유가 없는 건 아니다.

우연한 기회에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선집을 통해 철학의 오묘함을 접했던 필자는 과거를 거슬러 현재의 내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곤 한다. 어느 순간 동양철학자로 몸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타고르에서 ‘기탄잘리’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 시를 읽고 난 후 왜 타고르가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얻었는지 실감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타고르의 물음을 무시한 채 스스로 외면했다면 이 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인생의 철학의 숲도, 인문의 숲도, 명리의 숲을 일궈내고 가꾸지 못했을 것이다.

타고르는 “한밤중 숲 속의 꽃봉오리와도 같이 나를 이 광대한 신비의 품속에 피어나게 한 것은 무슨 힘이었을까요”라고 묻는다.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을 스스로 하고 있는데, 그 힘의 주체는 곧 “이름도 형태도 없는 불가해한 것이 나의 어머니 모습이 되어 나를 그 두 팔로 안았던 것”이라고 답한다.

여기서 이름도 형태도 없는 불가해한 것이란 표현에 있어 시인은 어떤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 모습을 한 신이 어떤 신인지 나는 겨우 짐작할 뿐이지만, 타고르는 그 불가해한 신성을 어머니의 품에서 경험한 모양이다.

타고르는 어머니를 빗대어 인간의 삶과 죽음 모두를 끌어안는 분이기에, 자기가 어머니의 태에서 떨어져 처음 경험한 세상이 낯설지 않았듯이 죽음의 세상 또한 낯설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리고 삶뿐만 아니라 죽음 또한 사랑할 수 있다고 표현한다.

타고르는 그런 확신을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어머니에 비유하여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다. 내가 이 시에 매혹된 것은 바로 “어머니가 그 오른편 젖에서 아기를 떼어낼 때 아기는 웁니다만, 바로 그다음 왼편 젖에서 그 위안을 찾아내게 마련이지요”라는 대목에서다.

얼마나 아름답고 숭고한 비유인가. 어머니가 그 오른편 젖을 물고 있던 아기를 떼어내는 행위를 우리가 ‘죽음’으로 읽는다면, 그 죽음은 어머니의 왼편 젖, 곧 불멸의 생명의 문지방에 닿게 하기 위한 가교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는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죽음의 신 야마(Yama)의 말처럼 외적인 쾌락의 추구가 죽음의 덫이 되리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다.

매서운 겨울을 지나 싹을 틔우고 꽃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의 일부를 통해 우리는 지혜를 배우게 된다. 그리고 그 이치를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을 기다리지 않아도 반드시 찾아오고야 만다.

오르지 않으면 그 높이를 알 수 없고, 내려가지 않으면 그 깊이를 알 수 없다고 했던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결국 자신도 모르게 보이지 않는 힘의 신세를 지고 마는 것을. 그것이 바로 우주와 모든 생명체의 관계다.

사계절의 연속성 그리고 그 테두리 안에서 계절에 얽매여 각기 다른 모양과 색을 띄며 그들만의 고유이름을 갖고 살아가는 식물들처럼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다. 동양 사상에 중심축을 두고 있는 명리학과도 참 많이 닮아있다.

그렇다면 명리학에서 이러한 현상을 두고 어떻게 다루고 있을까?

슬픔은 오행 중 금(金)에 속하며, 오장 중 폐에서 나온다. 그래서 몹시 슬프거나 상심하거나 하면 폐가 상하고 폐에 관한 질병을 가진 사람은 남보다 슬픔을 더 강하게 받아들인다. 참 공교롭게도 최근 발생해 문제시 됐던 대형병원의 결핵환자 발생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우리민족은 스스로를 일컬어 백의민족이라고 한다. 백은 흰색이고 금의 오행이며 슬픔을 나타내고 매운 맛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 사람은 한이 맺힌 노래를 좋아하고 매운 맛을 즐기며 OECD국가 중 폐에 관련한 발병률이 유달리 높다고 한다.

이럴 때 일수록 웃음이라도 지어보면 어떨까. 기쁨의 오행은 화이고 색깔로는 빨간색이고 오장 중 심장이다. 오행의 상생상극의 원리에 따르면 화가 금을 극하니, 기쁨이 슬픔을 몰아낼 수 있고 심장이 강해 지면 폐도 건강해지고 빨간색이 흰색을 붉게 물들일 수 있다.

그 남아 웃음에 돈이 들지 않아 다행이다. 국내경기가 찬서리를 맞아 서민들의 시름이 깊어져만 가는 요즘. 힘들고 어려울수록 자신을 위해 많이 웃어주고, 가족과 이웃에게도 많이 웃어 주자. 그러면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실제 미국 스탠퍼드 의과대학의 데이비드 스피글 교수는 유방암이 진행된 여성을 상대로 통증을 완화하는 자기최면요법을 시행했다. 10년 동안 관찰한 결과 자기최면요법을 시행한 그룹의 사망률은 그렇지 않은 그룹보다 2배나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는 강한 의지만 있으면 우리의 신체는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며 병을 다스릴 수 있다는 얘기다.

현재는 과거의 생각이 나타난 모습이다. 생각은 기를 발생시키고 기는 동질의 기운에 감응한다. 좋은 기는 좋은 기운을 불러들여 좋은 일을 발생시키고 부정적인 기는 나쁜 기운을 불러들여 안 좋은 일을 발생시킨다. 이는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인간의 신념이 필요한 일들을 생각하면 쉽게 공감이 가는 말이다.

지난 결정에 대한 한탄 등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은 알아야한다. 시시때때로 후회하고 아파한들 발생하는 것은 부정적인 파동뿐이고, 그것이 자기와 가족과 사회를 병들게 한다. 잊을 말은 잊어야 하고 잊을 일은 잊어야 한다. 과거의 치밀어 오르는 생각마저도 다 놓을 수 있으면 놓아야 한다.

타고르의 사상이 존재의 뿌리가 지금까지 균열 없이 연계되어 왔던 것은 “어느 날엔가 우리는 배우게 되리라. 영혼으로 얻은 그 무엇도 죽음이 훔치지 못한다는 사실을…(생략)”이라는 타고르의 짧은 시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듯 우리의 삶의 본성은 소우주에 머물며 시간의 흐름에 기생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깊이 있는 삶을 이루고 깨닫는 날을 기대하며.


fanta732@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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