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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 메카’ 강남고속터미널 상가 “아! 옛날이여”
뉴스종합| 2017-04-02 09:09
-강남고속터미널 상가 커튼 도매점서 일일 체험

[헤럴드경제=원호연ㆍ정경수 기자]서울 강남고속터미널 경부선 상가. 1980~1990년대 이곳은 ‘인테리어의 천국’이었다. 커튼부터 화훼까지 집을 꾸미기 위한 모든 것을 이곳에서 원스톱으로 구할 수 있었기 때문. 강남 지역이 떠오르면서 이곳에서 구입한 물건에는 ‘강남 물건’이라는 프리미엄까지 붙었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은 과거의 것이 되었고 이곳 인테리어 도소매 상가는 ‘과거의 향수‘에 묻혀가고 있다.

▶’마자질‘은 30년째 계속 되고 있다=본지 기자가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한 것은 지난달 16일 오전 9시 30분. 32년째 이곳에서 커튼 도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사장 박관식(57) 씨의 부탁으로 하루 일일 직원으로 일하기 위해서다. 8층 커튼 도매점은 사실상 원단 롤이 쌓여있는 창고였고 따로 앉을 의자는 없었다. ‘주문 수주-마자질-포장-배달’ 순으로 이어지는 작업에 필요한 기계는 없었다.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손수레, 가위만 있으면 모든 일이 가능했다. 필요한 기계는 90년대에도 존재했던 자동차와 휴대전화 뿐이다. 
한때 인테리어의 성지로 불렸던 강남 고속터미널 경부선 상가는 중국제 커튼과 인터넷 제품에 밀려 이제 추억을 먹고 사는 곳이 됐다. 본지 기자가 이곳에서 일일 직원으로 일하는 모습. 정경수 기자/kwater@heraldcorp.com


커튼 원단은 1.5m 길이에 20㎏을 넘는 롤 단위로 두루마리 휴지처럼 둘둘 말려있다. 두 팔이 아니라 어깨를 이용해 들고 순간적인 힘을 사용해 롤을 옮기지 않으면 다치기 십상이다. 소매점에선 도매점에 1야드를 의미하는 ‘마’ 단위로 원단을 주문한다. 한 마는 길이 단위다. 주문이 들어오면 한 마 단위의 자를 대고 다섯 마 혹은 여섯 마 단위로 가위질을 해야 한다.

박 씨는 “마자질에서 중요한 것은 주문받은 길이에 맞게 자르는 거예요. 주문 길이보다 짧아서도 안 되고 넉넉하게 자르면 그만큼 우리에게 손해죠”라며 정확성을 당부했다. 1야드 길이의 나무 자를 원단 아래에 잡고 빠르게 길이를 잰 뒤 삐뚤지 않게 일자로 자르는 데 온 신경이 곤두섰다. “빨리 배달가야 하는데 온종일 마자질만 하고 있을 겁니까” 이번엔 영업팀 과장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배달도 쉬운 일은 아니다. 각 소매점에 배달할 원단을 비닐봉투에 담을 때 구김이 가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불을 개는 것처럼 긴 원단을 여러 차례 접어 고이 봉투에 담으라”는 사장의 조언엔 수십년의 노하우가 담겨 있다.

이곳에서 주문은 전화로 받고 거래 내역 확인서는 통화 녹음으로 갈음한다. 기계나 컴퓨터를 왜 이용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박씨는 “유럽 쪽 대규모 도매점은 그렇게 하지만 길어야 10년 더 일할 텐데 투자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 불황은 투자를 꺼리게 만든다.

▶인터넷ㆍ중국 커튼에 밀려 매출 ‘뚝’=이날 원단을 배달할 곳은 동대문과 터미널 내 2층의 소매점이었다. 동대문으로 출발하는 차 안에서 과장은 “3월 성수기인데 오늘 물량은 평소의 반도 안 되는 양”이라며 경기 불황을 우려했다. 그는 “커튼이 일종의 사치품이다 보니 경기가 안 좋아지면서 소비가 많이 줄었다“며 “젊은 사람들은 블라인드를 선호하고 싼 중국산 커튼에 저희처럼 국내산 커튼을 취급하는 곳은 시장을 많이 뺏겼다”고 토로했다. 1990년대 매출에 비하면 60% 수준이라는 게 업계의 정설.

박 씨는 “고속터미널 내 커튼, 침구, 한복 등 혼수상가가 10년이면 사라지지 않겠냐”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젊은 세대들이 인터넷이나 이케아 같은 데서 파는 싼 기성 커튼 놔두고 비싼 돈을 주고 굳이 맞춤형 커튼을 사기 위해 터미널까지 오겠냐”고 했다. 실제로 이날 오후 배달을 위해 돌아다닌 터미널 내 30여개 소매점 중 손님이 있었던 곳은 다섯 곳에 불과했다. 15년 째 같은 자리에서 소매점을 운영하고 있는 유모 씨는 “10년 전부터 매출이 하락세에 들어서 언제까지 바닥을 칠지 모르는 상황”이라며 “상가 내 복합쇼핑센터 들어오면서 가게세만 오르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럼에도 이곳을 여전히 찾는 2030세대는 있다. 부모님 세대의 ‘향수’에 이끌린 이들이다. 9월 결혼을 앞두고 있다는 한 20대 여성 손님은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이곳을 자주 방문했는데 과거에 대한 기억 때문인지 신혼집 커튼을 꼭 여기서 사고 싶은 꿈이 있었다”고 했다. 한 소매점 상인은 “30년 넘는 시간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추억을 남겼고 아직도 그 향수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힘”이라고 전했다.

why37@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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