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도예 기자] 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반(反)정부 성향으로 분류된 문화예술인과 작품을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는 과정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정황이 법정에서 공개됐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0부(부장 황병헌) 심리로 열린 김종덕(60) 전 문체부 장관과 신동철(56) 전 청와대 정무비서관, 정관주(53) 전 문체부 1차관의 첫 공판에서 이같은 내용이 담긴 증거들을 공개했다.
특검팀은 박준우 전 정무수석의 업무수첩을 공개하며 김 전 실장이 지난 2013년부터 문화계 좌파 척결을 강조했다고 밝혔다. 박 전 수석은 블랙리스트 작성 업무를 맡다가 2014년 6월 교체됐고, 후임인 조윤선(51) 전 정무수석이 블랙리스트 작성과 활용 업무를 넘겨받았다. 이날 공개된 박 전 수석의 업무수첩에는 김 전 실장이 ‘전쟁에 임하는 자세로 좌파를 척결해야 한다’ ‘영화 변호인과 천안함을 언급하며 문화계 권력을 되찾아야 한다’고 지시한 내용이 담겨있다.
특검팀은 김 전 실장이 국가정보원을 동원해 블랙리스트를 관리했다고 법정에서 주장했다. 특검이 이날 공개한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업무일지에는 ‘국정원에서 팀을 구성해 케이스 바이 케이스가 아니라 리스트를 만들어 추적해 처단토록 해야한다’는 김 전 실장의 지시 사항이 적혀있다.
김 전 실장은 특히 세월호 참사에 대해 다룬 영화 ‘다이빙벨’ 상영을 막기 위해 문체부 관계자들에게 수시로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신동철 전 비서관은 검찰에서 “김 전 실장이 영화가 상영되지 못하도록 직접 지시하고 상황을 수시로 점검했다”며 “세월호 7시간 문제가 불거지고니서 더욱 강하게 반대 세력 배제와 우파 지원을 강조했다”고 털어놨다. 이날 특검이 증거로 제시한 문체부 내부 문건에는 다이빙벨 상영관 현황과 상영 횟수, 예매 여부, 상영관에 대한 정부 지원 여부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있었다. 특검팀은 “김 전 실장이 얼마나 집요하게 지시했는지 알 수 있는 자료”라고 설명했다.
조 전 수석이 지난 2014년 수석에 임명됐을 때부터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알았을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도 재판에서 드러났다. 박 특검팀은 이날 “후임인 조 전 수석과 만나 블랙리스트 관련해 설명했다”며 “조 전 수석도 처음에는 웃으면서 듣다가 ‘이런일들을 다 해야 하냐’고 했다”는 박 전 수석의 진술조서를 공개했다. 특검팀에 따르면 박 전 수석은 조 전 수석에 ‘대통령께서 다 챙긴다’고 답했다.
정무 수석에 오른 조 전 장관은 야당 후보를 지지한 문화계 인사들을 정부 지원에서 배제하기 위한 ‘민간단체보조금 TF’ 운영을 도맡았고, 김 전 실장이 조 전 장관의 신속한 대응을 칭찬한 것으로 특검팀은 파악했다.
박근혜(65) 전 대통령과 최순실(61) 씨가 블랙리스트 작성과 활용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점을 암시하는 증거도 법정에서 제시됐다. 이날 특검이 재판부에 제출한 문체부 정모 과장의 진술조서에는 ‘대통령이 흔들림 없이 추진하라고 했다고 들었다’, ‘다이빙벨 관련 비판적 기사를 신문에 싣게하는데 청와대 지시가 있었다고 들었다’고 적혀있었다. 특검은 최 씨가 측근 고영태(41)씨 등을 통해 ‘현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을 알아보라’는 취지의 지시도 내린 것으로 확인했다. 특검은 “최 씨가 블랙리스트와 관련해서도 보고를 받고 영향력을 행사한 사실이 있다”고 설명했다.
yeah@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