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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읽어주는기자] 2002년의 황선홍, 2018년의 이동국
엔터테인먼트| 2017-08-22 17:42
-1997년 ‘붉은악마’ 김수한 기자의 축구 이야기

[헤럴드경제=김수한 기자] 축구선수 황선홍은 국내 축구계 스트라이커 계보를 잇는 중요한 고리다.

스트라이커란 축구 용어로 굳이 번역하자면 골잡이다. 포지션은 포워드(FWD)다. 상대팀 골대 앞에서 골을 넣는 게 주 임무다. 축구에서 골은 곧 승패와 직결된다. 그래서 그 팀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가 포워드를 맡는다.

한국 축구 역사상 1960년대 대표 스트라이커는 ‘아시아의 황금발’ 최정민 선수라고 한다. 1970년대 대표 스트라이커는 ‘아시아의 표범’ 이회택, 1980년대 초반은 ‘갈색 폭격기’ 차범근, 1980년대 후반은 최순호, 1990년대 초반은 황선홍, 1990년대 후반은 이동국이 부동의 계보를 잇는다.

지난 21일 경기도 파주 국가대표 트레이닝센터에서 열린 축구대표팀 훈련에 소집된 이동국이 진지한 표정으로 훈련하고 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2000년대는 박지성, 2010년대는 손흥민이 부동의 반열이다. 일각에서 2000년대 대한민국 대표로 박주영을 거론하기도 하지만, 이중국적 논란 등의 물의로 논란이 있다.

이 중에서 황선홍은 199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한국 축구사에 큰 획을 긋는 존재다. 20대 초반 대학생 국가대표로 데뷔해 30대 중반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골잡이 역할을 했다. 은퇴를 앞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팀 4강 신화의 주역이었다. 또한 선수 은퇴 뒤에는 국내 프로팀 감독으로 데뷔해 K리그 우승, FA컵 우승 등을 이뤘다.

▶6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 스트라이커의 계보=프로축구팀 감독으로서 대부분의 정상에 오른 그의 목표는 아시아 전체 프로팀 중 최고팀을 뽑는 아시아챔피언스리그 우승 트로피다. 아울러 그에게 남은 도전은 국가대표팀 감독직이다.

그러나 황선홍이 꽃길만 걸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황선홍은 축구선수로서의 절정기 내내 ‘비운의 공격수’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야 했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4년 미국 월드컵,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황선홍은 월드컵 본선 진출의 최대 공헌자였지만, 정작 본선에서는 기량을 십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존재감은 ‘대체불가’였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당시 차범근 대표팀 감독은 부상을 입은 황선홍을 대표팀 명단에 포함시킬 정도로 애착을 보였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도 거스 히딩크 감독이 당시 30대 중반을 넘은 황선홍을 ‘한국 대표팀 전력의 절반’이라며 칭송할 정도였다.

황선홍의 남은 인생에 단 한 번의 기회가 남았다면 2002년 한일월드컵 한국대표팀 첫 경기인 폴란드전이었을 것이다. 그 경기에서 황선홍은 10년이 넘게 자신을 한국대표팀 간판 공격수로 중용한 한국 코칭스탭에 기어코 보답했다. 이을용의 어시스트를 공중에서 그대로 공간 이동시키는 신들린 환상골은 그렇게 탄생했다.

대표팀 맏형 황선홍의 환상골이 터지면서 지난 10여년간 꽉 막힌 듯 답답했던 한국팀의 월드컵 골 체증이 시원하게 해소됐다. 유상철의 폴란드전 추가골로 한국팀의 월드컵 첫승이 완성됐고, 포르투갈전 박지성의 골, 이탈리아전 안정환의 역전골, 스페인전 승부차기 승리 등 전설이 쓰여졌다.

이동국은 등장부터 황선홍을 연상시켰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18세의 나이로 국가대표팀에 합류해 축구 신동의 등장을 알렸다. 2002년에는 포워드 포지션 경쟁에서 선배 황선홍은 합류, 자신은 탈락하는 불운을 겪었다.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 골잡이 후보로 다시 주목받았지만, 월드컵 두 달 전 국내 경기에서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돼 또 한 번 분루를 삼켰다. 월드컵 불참 후 꾸준한 자기 관리로 국내 프로무대 최고의 선수로 자리매김했지만, 서서히 그에게 황선홍처럼 ‘비운의 스트라이커’라는 꼬리표가 붙기 시작했다.

▶황선홍과 이동국 닮은 꼴 행보=2010년 남아공월드컵은 30대가 된 이동국에게 마지막 남은 단 한 번의 기회로 보였다. 실제로 우루과이와의 16강전에서 이동국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 박지성의 패스가 최전방에 있던 이동국에게 전달됐지만, 슛이 무위에 그친 장면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예선에서 이동국은 다시 대표팀으로 발탁돼 본선행을 결정짓는 손흥민의 골을 어시스트하는 등 활약했지만, 정작 본선에 진출한 대표팀 명단에서 이름이 빠지고 말았다. 그리고 내년 러시아월드컵 예선 두 경기를 남겨놓은 시점에서 30대 후반의 나이에 다시 대표팀의 호출을 받았다.

황선홍은 90년, 94년, 98년, 02년 네 번의 월드컵 출전 끝에 만개했다면 이동국은 98년(참가), 02년(불참), 06년(불참), 10년(참가), 14년(예선 참가, 본선 불참), 18년(?) 등 6번의 월드컵의 기회 속에 마지막 칼을 갈고 있다.

황선홍 감독은 이동국에 대해 지난 18일 한 언론 인터뷰에서 “대단하더라. 순간마다 나이를 먹었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라. 무리한 장면 대신 간단하게 하고 기회가 오면 슈팅하는 것을 잘하더라. 제어를 정말 잘한다. 90분을 계속 경기하면 티가 나겠지만 교체나 선발로 나서서 6~70분을 뛰면 힘든 티가 나지 않는다. 속임 동작을 잘했다. 상황에서는 적절하게 사용하더라. 나도 봤지만 속을 수밖에 없더라. 19살부터 20년 동안 문전에서 훈련하고 경기하면서 몸에 익숙해졌을 것 아닌가”라며 극찬했다.

황선홍 감독은 감독 데뷔 후 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자신을 발탁한 이회택 감독과 닮은 꼴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회택, 황선홍 감독은 모두 감독 데뷔 6년차, 포항 연고팀(포항제철, 포항스틸러스) 감독 3년차에 프로축구 정규리그 우승을 이뤘다. 또한 그해 감독상을 받아 국내 리그 최고의 감독에 올랐다.

이동국은 포항스틸러스 입단 첫 해인 1998년 팀 선배 황선홍과 같은 방을 쓰며 그를 롤모델로 삼아왔다. 98년 프랑스 월드컵 직전 중국팀과의 평가전에서 무릎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입은 황선홍, 2006년 독일월드컵 직전 무릎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입은 이동국의 부상 행보도 닮은 꼴이다.

이동국은 10년전인 2007년 영국프리미어리그에 데뷔(미들즈브러)하면서 선배 황선홍 등번호인 18번을 굳이 달고 뛰었다. 존경하는 선배를 향한 오마주다.

이번에 38세 4개월의 나이로 태극마크를 달게 된 이동국은 고(故) 김용식 선생이 1950년 4월 15일 홍콩전에서 작성한 역대 최고령 대표선수 기록(39세 274일)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최고령 대표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K리그 역대 최다골 기록(196골) 보유자인 이동국은 38살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K리그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2018년의 이동국은 2002년의 황선홍처럼 기억될 수 있을까. 물론 그 전에 본선 진출을 확정지어야겠지만 말이다.

soo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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