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피플 & 스토리]“‘제2 버스커버스커’ 발굴…인천, 포크송 메카로 만들것”
엔터테인먼트| 2017-09-01 11:04
-‘잊지는 말아야지’‘슬픈계절에 만나요’ 등 7080 숱한 히트곡 남긴 음유시인 백영규
-‘제2 고향 인천’ 음악으로 스토리텔링, 대중문화 공간으로…


거의 40년간 포크와 어덜트 컨템포러리 장르 음악을 해온 싱어송라이터 백영규(65)는 인천을 지키는 가수다. 1952년생으로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5년때 경찰공무원이던 아버지의 직장 전근으로 인천의 부평으로 이사왔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50년 넘게 인천에 살고 있다.

지금은 인천 남동구 논현동에 있는 아파트촌에 살고 있다. 그곳은 상전벽해의 장소라고 한다. 그는 부평서초교, 동산중고를 거쳐 서울에 있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이태리어과에 입학했다.

백영규는 대학 재학 4년내내 인천을 떠나지 않고 서울의 학교까지 통학했다. 부평에서 서울역까지 기차를 타고 온 뒤 서울역에서 이문동까지 가는 일반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했다.

사실 통학하기에는 먼 거리였지만, 친구들이 있는 인천을 떠나기 싫었고 서울과는 다르면서 좀 떨어져 있는 인천의 지역성과 분위기를 유지하고 싶었다고 했다. 백영규가 대학을 다니던 70년대는 10월유신(1972년) 등 군사정권의 억압이 심했던 시대였다.

“대학생땐 정치 이데올로기 같은 건 몰랐어요. 오로지 놀자는 생각 뿐이었죠. 대학 시절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진로가 바뀌잖아요. 데모도 친구들이 하니까 비겁해지기 싫어서 한 적은 있지만요. ”

백영규는 느리게 성숙하는 스타일이었다. 학교 공부는 뒷전인 채 캠퍼스에서 통기타를 치던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런 감성이 있었기에 아날로그형 어쿠스틱 기타가 어울렸고, 그런 감성이 노래를 만드는 자양분이 되었다.

백영규...▶1952년 경기도 양평 출생 ▶1970년 인천 동산중고 졸업 ▶1978년 한국외국어대학 이태리어과 졸업 ▶1978년 혼성듀엣 ‘물레방아’ 순이생각으로 데뷔 ▶1980년 ‘슬픈계절에 만나요’로 솔로데뷔. MBC 신인상 수상. 동명으로 영화화 ▶1983년 음반제작기획사 소리창조 설립 ▶2007년~현재 경인방송 ‘백영규의 가고싶은 마을’ 진행 ▶2016년 신곡 ‘술한잔’ 발표. ▶정규앨범 14장 포함 제작앨범 등 40여장 발표 ▶자랑스런 인천인대상 문화부문 수상

외국어대 세계민속제전에서 노래 부른 게 가수 된 첫 계기=백영규가 대학시절 가수로 조금 유명해진 계기가 있었다. 당시 외국어대학교에는 다른 대학에서는 하지 않는 세계민속제전이 있었다.

“제가 외국어대 다닐때 세계민속제전이 만들어졌어요. 당시 4학년인 학회장이 한번 나가 볼 사람이 있느냐고 묻길래 제가 그중에서 제일 먼저 손을 들었어요. 그때 무슨 용기로 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학회장 선배가 “뭘 보여줄꺼야” 라고 묻길래, 이태리의 칸초네를 부르겠다고 했죠. 그때 트윈폴리오가 부른 번안가요 ‘축제의 노래’(Aria Di Festa)를 인천 친구인 남기창과 함께 불렀어요.”

백영규는 이 일로 인해 여러 캠퍼스에 알려져 노래를 부르게 됐다. 그 이듬해에는 이화여대 축제 행사에 초정돼 노래를 불렀다. 그는 “이대 축제 행사에 친구인 유심초와 같이 간 걸로 기억됩니다. 당시는 여학생 틈속에서 많이 긴장했던 것 같아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백영규는 대학졸업후 1978년 ‘순이 생각’으로 데뷔했다. 졸업후 기업에 입사하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아세아레코드 박경춘 사장에게 연락이 와 그동안 통기타를 연주하며 녹음해둔 데모 테이프를 전해주면서 가수로 데뷔하게 됐다는 것. ‘순이 생각’은 그 데모테이프에 수록된 곡이다.

“1978년 1월 ‘순이 생각’으로 데뷔할 때는 ‘물레방아’라는 혼성듀엣이었어요. 배우 황신혜가 나온 인천의 명문 인일여고를 졸업한 이춘근 씨가 저보다 한 살 아래였는데 노래를 잘해 아시아레코드 박경춘 사장(당시 상무)이 전격 발탁했죠. 다운타운 밤업소가 아니라 통기타 치는 걸 한번 듣고 발탁한 거죠. 이춘근 씨는 오리지널 인천 사람이에요. 숙명여대 체육학과를 졸업했고, 국악도 할 줄알고 나중에 사회활동도 했어요. 우리는 그해 10월에 2집 ‘잊지는 말아야지’까지 두 곡을 히트시키고 바로 해체했어요. 저는 80년에 솔로로 나왔고 이춘근 씨도 그해 솔로로 데뷔했어요.”

포크에 트로트 가미해 신선한 발라드. 팝과 락도 섞여=백영규는 데뷔곡 ‘순이 생각’은 자신이 태어나고 초등학교 5학년 이전까지 살았던 경기도 양평을 생각하면서 만든 노래라고 했다. 고향 감성을 ‘순이’라는 여자 아이를 통해 노래했다는 것.

백영규는 80년 가을 솔로로 나서 발표한 ‘슬픈계절에 만나요’는 더 크게 히트했다.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가슴깊이 파고드는데’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가사가 매우 좋다. 자신의 이름 석자를 알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노래다. 그래서 그는 무명 시절이 없다.

“당시는 ‘슬픈계절에 만나요’ 같은 발라드는 없었어요. 약간 트로트 같은 느낌이 있으면서도 신선한 발라드 느낌이 났어요, 당시 조용필 씨의 노래 ‘창밖에 여자’가 히트해 영화화가 됐고, 나도 1981년 개봉한 영화 ‘슬픈 계절에 만나요’에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았는데 연기가 제대로 될 리 없었죠.”

백영규는 당시로서는 신선하고 새로운 느낌이 나는 노래를 어떻게 작곡하게 됐을까? 그는 중고대학시절 유심초, 이춘근 등과 교류하며 통기타를 치며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전문 작곡가 출신이 아니어서 당시 주류음악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다.

“저보다 먼저 활동한 김정호, 신중현 선배님의 노래를 많이 들었어요. 특히 신중현 형의 노래를 참 좋아했어요. 팝을 잘 몰랐지만 독특하고 팝스런 것들에 매력을 느꼈어요. 당시는 혼성듀엣 해체후 솔로로 데뷔하면 잘 안된다는 게 정설이었어요. 혼성듀엣에서 남자는 기껏 하모니로 받쳐주는 들러리이고 메인보컬이 여자니까 더욱 그런 소리가 나왔던 것 같아요.”

백영규의 음악에는 팝과 포크, 트로트, 락 등의 장르가 적절히 섞여 당시로서는 우리 정서에 기반하면서도 신선하고 세련된 느낌의 음악을 내놓을 수 있었다.

“팝을 많이 아시는 작사가이신 고(故) 엄진 씨가 저를 적극 추천해 신세계에서 70년대말 노래를 몇 곡 발표했어요 그중에는 79년 발표한 ‘가신 님 그리워’가 방송을 타면서 괜찮은 반응을 얻고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제목때문에 방송에도 안나오고 묻혀버렸어요. 그 이듬해 ‘슬픈 계절에 만나요’는 집에서 작곡했는데, 시집을 뒤지다가 김광균의 ‘와사등’을 보면서 영감을 얻었어요. 제목도 와사등을 보고 떠올렸어요. 단어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썼어요. 가사에 ‘해맑은’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당시 노래에 해맑은이라는 단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어요.”

백영규는 통기타로 시작했는데 음악 장르는 한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고 했다. 다양한 장르가 묘하게 섞여있다.

1983년 ‘소리창조’ 설립. 가수 출신 기획사의 원조=백영규는 이미 1983년 ‘소리창조’라는 회사를 만들어 음반 기획제작업에도 뛰어들었다. 당시로서는 가수가 제작업에 나서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수만, 양현석, 박진영 등 가수 출신 기획사의 원조라 할만하다. 그는 작사, 작곡, 노래에 신인가수를 발굴해 기획, 제작까지 하는 등 만능 엔터테이너의 모습을 보였다. 백영규는 김세화를 만나 재기 앨범 ‘아그네스’를 기획 작곡하고 제작해 라디오 방송에서 1위에 오르게 하는 등 큰 재미를 보았다. 박정수의 ‘그대 품에 잠들었으면’라는 곡도 만들어 이 회사를 통해 발표했다.

백영규는 다른 가수에게 노래를 주기도 했는데, 이밖에도 방미의 ‘계절이 두 번 바뀌면’이 다른 가수가 부른 대표적 히트곡이다. 백영규에게 왜 일찌감치 제작업에 뛰어들었는지를 물어봤다.

“79년대말과 80년대초 공개방송 할때 제가 인기가 있으니까 방송국에서 모시는 분위기였 어요. 하지만 저는 피크에 올라있는데, 차도 없었어요. 제 매니저는 기를 죽이는 스타일이었어요. 한쪽에서는 난리가 났는데도 저는 눌러져 있었어요, 인기는 거품 같은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제작이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슬픈 계절에 만나요’도 제가 제작할 뻔 했어요. 제작을 해 인세로 벌어먹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3년후인 83년 ‘소리창조’라는 기획사를 차려 ‘소리창조 옴니버스 1집’을 제작했어요. 마니아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길거리 캐스팅까지도 했어요. 노래를 가르쳐가면서 가수를 발굴했어요. 아마추어 제작자라 더욱 풋풋하게 느껴졌을 거에요. 김세화를 만난 것도 그때에요.”

백영규는 경인방송 라디오에서 ‘백영규의 가고 싶은 마을’ 이라는 프로그램을 10년째 진행하고 있다. 인천 노래추진단의 한사람으로 인천을 소재로 한 노래도 작곡하고 있다. 자신이 성장한 고장인 인천의 역사와 숨겨진 이야기, 인천 사람의 정서와 애환을 담아 소개하는 작업이어서 지역적으로는 큰 의미가 있다.

“인천의 대중문화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올들어 목소리를 내게됐어요. 선배로서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서울은 인천보다 대중문화가 더욱 더 다양한데, 그럼 인천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인천을 포크음악의 메카로=이를 위해 백영규는 인천을 포크음악의 메카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내놓고 실행에 옮기고 있다. 버스커버스커의 노래 히트로 여수가 관광도시로 더욱 탄력을 받은 사실을 예로 들었다. 확고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포크음악이 인천에서 보다 더 활성화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2017인천포크음악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지난 8월초 연수구 문화공원에서 미니포크페스티벌 형식으로 열었다.

“실력있는 가수들은 서울에 포진해있지만, 서울이 대중음악에서 놓치는 것도 많아요. 인천이 소외된 뮤지션에게 편안하게 녹음할 수 있게 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실력있는 뮤지션이 통기타를 내려놓아요. 인천을 포크음악의 공간이자 스토리텔링 장소로 만들었으면 해요. 그래서 유명인 아닌 무명을 많이 발굴해야죠. 정통 포크만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락, 클래식, 국악 등 다른 음악장르를 흡수하고 크로스오버할 수 있겠죠.“

백영규는 앞으로도 인천을 음악으로 스토리텔링 하는 작업을 꾸준히 할 예정이다. 그는 인천 공무원 등을 대상으로 강연요청도 자주 받고 있다. 영혼이 없는 공무원에서 벗어나고, 창작하는 공무원, 생각하는 공무원이 되자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창작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주변에 깔려있고 창작자가 아닌 일반인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며, 시장과 구청장을 위한 것이 아닌 시민과 구민을 위한 일을 하는 것의 차이에 대한 강의 내용도 공감을 얻었다.

백영규는 ‘순이 생각’ ‘잊지는 말아야지’ ‘슬픈계절에 만나요’ 등 70~80년대 히트곡만 있는게 아니라 지난해 발표한 ‘술 한잔’도 히트하는 등 최근에도 계속 신곡을 내놓고 있다. 노래는 그의 표현수단이라 살아있는 한 계속 나올 것 같다.

서병기 선임기자/wp@heraldcorp.com

사진=이길동 기자/gd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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