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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디자이너 베르탱, 어떻게 ‘성공한 여성 상인 1호’가 됐나
라이프| 2017-09-01 11:14
-여성복 상점서 옷 사 입는 ‘쇼핑시대’ 열어
佛 앙투아네트의 ‘패션大臣’으로 승승장구
-阿 정복으로 이어진 백색신화 ‘피어스 비누’
英서 만든 중간 유통 건너뛴 ‘트레이드 카드’
세상 변화 시킨 하찮은 소비의 역사 천착


역사에 이름을 남긴 최초의 디자이너는 로즈 베르탱(1747~1813)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디자이너였다. 옷가게 견습생으로 일하다가 1770년 파리 생토노레 거리에 ‘르 그랑 모골’이란 상점을 차린 그는 앙투아네트의 전적인 신임을 얻어 승승장구 하게 된다. 앙투아네트는 일주일에 두 번씩 베르탱을 궁으로 불러 새드레스를 맞췄다. 1780년대 궁정의 재무 기록에 따르면, 앙투아네트가 쓴 의상비의 절반 이상이 베르탱에게 지불됐다. 베르탱은 궁정 귀족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귀족인양 행세해 ‘패션 대신’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치품을 만들어 부패를 초래한 자이자 부패 그 자체’로 지목돼 프랑스혁명 팸플랫에 그의 이름이 오른 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의 적폐’였던 베르탱은 소비의 역사에서 보면 전혀 다른 평가가 나온다. 마르샹 드 모드(La Marchande de modes), 여성 상인의 화려한 등장을 보여주는 사례다. 베르탱은 모자나 리본, 장식이 달린 드레스, 패션 소품 등 부인복을 취급하는 성공한 여성 상인 1호였던 셈이다. 집에서 옷을 지어 입던 여성들이 상점에서 사 입게 된, 소비 혁명의 중심에 베르탱이 자리잡고 있다. 

“상품 카탈로그의 역사는 르네상스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498년 베네치아의 유명한 출판업자 알도 마누치오가 자신이 출판하던 책의 카탈로그를 만들어 배포했는데, 이것이 아마도 서구 역사상 최초의 상품 카탈로그일 것이다.”(‘소비의 역사’에서)

설혜심 연세대 사학과 교수가 쓴 ‘소비의 역사’(휴머니스트)는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하찮은 소비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켰는지 살핀다.

저자는 역사가들이 주목하지 않은 익숙한 물건과 공간, 소비라는 인간의 행위와 동기를 통해 사회의 취향, 의식 등 역사의 미묘한 측면을 드러내 보인다.

요즘 모든 화장품이 선전하는 미백제품을 만들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둔 경우는 웨일스 출신의 이발사 앤드류 피어스다. 그는 1789년 런던에 이발소를 차리고 부자 손님들의 안색을 개선해줄 파우더, 크림을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얼굴빛은 곧 신분이었다. 햇볕에 그을리거나 거무튀튀한 얼굴은 노동계급으로 여겨졌다. 흑백은 계급의 표식이었다.

그가 만든 미백 화장품과 비누의 인기는 갈수록 커져 그는 대량생산을 모색한다. 글리세린과 다른 자연 성분을 배합해 만든 피어스 비누는 세계 최초의 투명한 제형의 비누였다. 1807년부터 판매되기 시작해 큰 인기를 끈 피어스 비누는 공격적인 광고 전략으로 새로운 상품문화를 선도하기도 했다. 즉 빅토리아 시대의 라이프스타일의 표준, 깨끗한 집과 화목한 가족이라는 이상을 피어스사는 비누광고를 통해 알린 것이다. 면도하는 남성이나 코르셋의 리본을 조이는 여성의 모습, 하녀가 밤에 주인의 침실에 자리끼를 들여오는 장면 등 내밀한 가정생활을 공적인 영역으로 불러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피어스 비누는 문명을 앞세운 정복의 메시지를 담아내는데도 기여했다. 1884년의 광고는 북아프리카인들을 배경으로 ‘영국의 정복 비법’이란 타이틀 아래 ‘피어스 비누가 최고’라는 노골적인 표현을 쓰고 있다.

아이돌 앨범의 필수 아이템인 포토카드의 원조격인 트레이드 카드는 1630년대 선보였다. 영국에서 처음 만들어진 트레이드 카드는 처음에는 상점마다 취급하는 물건을 그려넣고 주소를 명기한 단순한 종이 인쇄물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장식적인 그림이 들어가는 등 예술성이 가미돼 수집가들까지 생겨났다.

미국에선 1727년 보스톤 서적상 토마스 핸콕이 최초로 트레이드 카드를 사용했다. 대중적인 마케팅으로 자리잡은 건 1860년대 이후. 크로모리소그래피로 불리는 다색 석판 인쇄술이 발전하면서 저렴한 비용으로 그림을 대량 복제할 수 있게 된 덕이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트레이드 카드가 나오면서 수집열풍이 불고, 제조업자는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이를 활용했다. 19세기 초, 중반까지 소비자의 구매 방식은 중간 유통업자라 할 수 있는 도매상이나 소매상을 방문해 그곳에서 취급하는 물건을 사는 식으로 이루어져 선택이 제한적이었다. 트레이드 카드는 생산자가 중간 유통업자를 뛰어넘어 직접 브랜드를 알리고 시장 지배력을 키워나가는데 유용한 수단으로 작용하게 된다.

저자는 약장수와 방문판매, 백화점과 쇼핑몰 등 근대적 판매방식과 공간의 역사를 함게 살피며 소비의 이면에 숨겨진 저항과 연대의 장구한 역사도 들려준다. 상품과 당시 사회를 보여주는 200여컷의 희귀한 사진과 그림들은 별도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소비사는 국내에선 아직 생소한 분야이다. 서구에선 1980년대 이래 급성장해 역사의 빈 자리, 사각 지대를채우면서 첨단 연구 분야로 자리매김한 상태다. 서구의 연구현황을 통해 한국 역사학의 지평을 넓힐 가능성을 모색한 점도 평가할 만하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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