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님, 37세 김기백 씨를 아십니까”
지난달 18일 기자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울중앙지검 첨단범죄수사1부 수사관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은 다짜고짜 이같이 질문했다. 그는 “금융사기 범죄에 연루돼 검거된 김 씨 일당이 당신의 명의로 된 제일은행 통장을 돈세탁하는데 이용했다”고 설명했다. 김 씨에게 통장을 판매한 공범인지 피해자인지 여부를 수사해야하니 협조해달라고 했다.
서초동 법원을 1년 남짓 출입하며 기사를 썼지만, 수사관이 유선으로 전화를 걸어온 건 처음이었다. 전화금융사기인 보이스피싱 같았다. 전화를 끊으려 “소환장부터 보내세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 상대방은 담담하게 반응했다. 그는 “전국에 피해자들이 너무 많아 일부를 전화조사하고 피해 입증 자료를 제출받고 있다”며 코웃음쳤다. 그는 전화 끊을 틈도 주지 않은 채 “검사님께 사건 설명을 듣고 출석하시라”며 수화기를 넘겼다.
고압적인 말투의 남성이 전화를 바꿔받았다. 서울중앙지검 이진석 검사라고 했다. 그는 정확한 표준어 발음을 구사했고 실제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사용되는 각종 법률 용어도 언급했다. 그는 “소장부터 확인시켜드리겠다”며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하도록 유도했다. 해당 사이트에 접속하자 ‘법무부 형사사법 포털 나의 사건검색’이라 쓰여진 페이지가 보였다. 이름과 주민번호 앞자리를 입력하자 ‘서울중앙지검 2017년 조사7401호 안건’이란 제목의 가짜 공문서가 등장했다. 그는 “범인들이 당신 명의로 된 통장을 이용해 중고나라에서 사기범행을 벌여 본인이 형사고소된 것”이라며 “피해자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 금융기관에서 서류를 발급받아 임의제출하라”고 했다. 그는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받아 15일 간 계좌를 동결한 채 수사할 수도 있다고도 부연했다.
보이스피싱 사기라고 생각했지만, 유창한 언변에 ‘반신반의’하게 됐다. 일단 이들이 시키는대로 해보기로 했다. 서류만 제출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은행 앞에 도착하자 남성은 계속해서 말을 바꿨다. 그는 당초 서류만 발급받아 제출하면 된다고 했지만, 예금이 인출되는지 확인해보라고 추가로 지시했다. 그는 “김 씨 일당 중 일부가 금융권에 종사하고 있다”며 “계좌에 예금이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대포통장으로 옮겨져 ‘깡통 통장’일 수 있다”고 했다. 터무니없는 주장이지만 순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구 직원의 이름과 직책을 알려달라’ ‘인출 목적을 물으면 개인사업이라고 답하라’는 요구도 이어졌다.
수중의 자산은 얼마 안되지만 거액의 현금을 인출하는 건 겁이났다. 은행을 나와 전화를 통해 돈을 인출했다고 했다. 그러자 남성은 고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출한 돈이 범죄수익인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다”며 “당신이 가담자인지 피해자인지도 확실치 않으니 용산의 지문인식 무인금고에 돈을 넣어두라”고 윽박질렀다. 순간 보이스피싱이란 걸 확신했다. 기자가 “제 돈은 제가 보관하겠다”고 말하자 남성은 “한 시간이나 전화를 받아놓고!”라며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이후 태도가 돌변해 “끊기전에 한말씀 물어볼게요. 뭐가 제일 의심스러우셨어요”라며 피드백까지 요청했다.
기자는 사기범들에게 돈을 건네지는 않았다. 그러나 보이스피싱에 속아 돈을 건네 경찰에 신고한 건수는 올 1월부터 10월까지 총 1만 8921건으로 집계됐다. 피해액만 총 1909억 원에 이른다. 이 중 기관을 사칭한 보이스피싱 범죄는 총 4584건 발생했고, 피해액은 754억 원으로 나타났다.
경찰 관계자는 “수사기관이 돈을 인출하거나 계좌이체를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며 “이점을 유의해 피해를 예방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도예 기자/yeah@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