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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광장-강태은 프렌닥터연세내과 비만클리닉 부원장]‘호찬스 데이’
뉴스종합| 2018-05-08 11:30
10년 전 우리 가족에게는 특별한 ‘이벤트 데이’가 있었다. 아들의 이름을 딴 ‘호찬스 데이(Hochan’s day)’였다. 징검다리 연휴로 일상의 지친 한숨을 나눠 쉬던 가정의달 5월, 흥미로운 제안에 아들은 기뻐했다. ‘호찬스 데이’란 아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거절 않고 아빠, 엄마가 함께해 주는 ‘원 데이 이벤트’였다.

단, 조건이 있었다. 24시간 절대 공부하지 않고. 책을 읽거나 글씨를 써서도 안되며, 이를 어길 시 그 시간부터 효력을 상실하고 평생 ‘호찬스 데이’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들에게도 잘 걷는다고, 잘 먹는다고, 대소변 잘 가린다고 하루 종일 칭찬만 받으며 살던 소싯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들도 어쩌다 학생이 돼 버렸다. 게임보다 좀 재미없는 받아쓰기나 수행평가에서 점수를 올리고 “너 몇등이야”란 장난 섞인 친구들 농담에 적잖게 스트레스를 받던 아들의 속내를 읽던 필자의 제안이었다. 또래 친구들은 절대 누려본 적 없는 흥미로운 이벤트에 아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엄마, 0시부터 가능한 거예요? 아니면 일어난 시간부터 잘 때까지예요?” 0시부터라면 밤을 새우겠다는 의도였다.

필자는 꾀를 더해 지혜로운 엄마인 양 아들을 설득했다. “‘호찬스 데이’의 유효 시간은 0시부터가 맞지만, 우리가 좋아하는 놀이 공간이나 음식점이 다 아침이 돼야 문을 여는데 우리가 밤새 놀아서 지쳐 버리면 제일 재밌게 놀 수 있는 시간에 졸려서 못놀지 않을까?” 금방 설득이 됐다. 아들은 시계 알람을 맞춘 뒤 다음날 입고 나갈 옷을 미리 입고 잠이 들더니, 젖 달라 울부짖던 갓난아기 시절 이후 처음으로 오전 5시 우리 부부를 흔들어 깨웠다.
아들의 첫 스케줄은 ‘인근 대학교 잔디 구장에서 축구하기’였다. 졸고 있는 필자에게 “엄만 골키퍼”란다. 아빠와 공을 차며 ‘페널티킥’과 ‘경기 중단’까지 선언해 가며 주심과 선수 역할을 톡톡히 해내더니, 이젠 아빠, 엄마와 함께 잔디 구장에 누워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한다. 미세한 자갈돌이 신발 속으로 꿈틀꿈틀 들어왔고, 생전 처음 아침 이슬 촉촉한 잔디에 등을 적시고 누워도 봤다.

아침으로 아들은 24시간 콩나물국밥집에 들어가 해장을 하는 아저씨들과 나란히 앉아 국밥을 먹었다. 이후 기다림의 공포를 감수해야 하는 놀이공원을 거쳐, 패밀리레스토랑에서 식사한 후 동물들과 로봇들이 화면을 꽉 채운 판타지 영화를 봤다. 다음으로 축구 경기장을 가고 싶다고 한다. 5월임에도 비가 조금씩 오더니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하자, 실외 관람석 추위를 이기려 셋이 똑같은 후드 티셔츠를 함께 사 입었다.

아들이 좋아하는 안창살로 하루를 마감하며 돌아오는 길이었다. “엄마, 세상엔 게임보다도 재밌는 게 너무 많은데, 친구들도 나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세상을 다 가진 양 행복해하는 모습에 우리 부부는 괜히 ‘호찬스 데이’를 시작한 게 아니냐며 힘겨워했던 서로를 반성했다. 그리고 ‘어떤 아들로 키울 것인가’에만 집중했던 교육의 기준에 변화가 필요함을 느꼈다. 기준은 바뀌었다. ‘우리는 어떤 부모로 성장할 것인가!’

그날 이후 우리는 틈나는 대로 ‘호찬스 데이’를 통해 소소한 추억을 쌓아왔다. 몇년 전, 아무도 권유하지 않던 무언가에 필자가 도전한 적이 있다. 실패를 했고 낙심하는 엄마의 모습을 아들이 지켜봤다. 힘겹던 어느 주말, 아들이 오랜만에 ‘호찬스 데이’를 하고 싶다는 것이 아닌가. 속으로는 엄마가 힘든 상황에 ‘호찬스 데이’를 말해 철없는 것이 아닌가 서운했지만, 한편으로는 눈치 보며 말 못하는 것보다 소신 있게 성장하는 것이라며 또 한번의 ‘호찬스 데이’를 맞이했다.

연어베네딕트가 나오는 브런치, 추억의 여행지의 그 바람, 그 내음이 난다며 함께 마음 속에서 그려 보던 작은 언덕, 한 점을 남기면 끝까지 싸워 먹던 맛 좋은 소고기집. 아들이 선택한 모든 경험은 전부 나를 위한 것이었다. “엄마가 웃으니까 좋다.” 그날, 필자는 아들에게 인생 최고의 ‘태은스 데이’를 선물받았다.

가정의달은 의무가 아니다. ‘돈 잘 버는 아빠’, ‘살림 잘 하는 엄마’, ‘공부 잘 하는 자녀’라는 대한민국의 남부럽던 ‘세상공식’을 하루쯤 잊어 보길 바란다. 서로에게 무거웠던 마음 속 의무를 내리고 소중한 가족을 위해 먼저 ‘호찬스 데이’를 제안해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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