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일반
[현장에서]“평화는 개선보다 귀하다”
뉴스종합| 2018-05-14 11:24
“평화(平和)는 개선(凱旋)보다 귀하다.”

지난 2월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태권도가 하나로 뭉친 자리에서 남측 태권도 시범단은 ‘평화는 개선보다 귀하다’는 현수막을 펼쳤다.

북측 공연단도 화답했다. 공연 후 남과 북의 태권도 시범단 단장이 서로 손을 맞잡자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보내며 환호했다.

세계 태권도계는 남측이 중심이 된 세계태권도연맹(WT)과 북측이 중심이 된 국제태권도연맹(ITF)으로 양분돼 있다.

이날 ‘평화는 개선보다 귀하다’라는 현수막을 펼친 시범단은 바로 남측의 WT 시범단이었다. WT 시범단이 그 현수막을 펼친 이유는 물론 남북의 평화를 염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문구가 경희대학교 설립자이자 경희학원 이사장을 역임한 고 조영식 박사가 지난 1982년 펴낸 책 제목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일제시대 학도병으로 징집돼 고초를 겪고, 1946년 월남 후 6.25전쟁을 몸소 겪은 조 박사는 대학을 설립하게 되면서 전쟁이 아닌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교육하는데 평생 힘썼다고 한다. 그의 어록에 따르면, 조 박사는 “학문은 평화를 위한 것”이라고 강조하고, “평화는 개선보다 귀하다”고 역설했다.

그의 평화론은 안팎으로 반향을 이끌어냈다.


조 박사는 대학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세계대학총장회의 창설을 주도했고, 지난 1975년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제4차 세계대학총장회의 총회에서는 GCS운동을 제창했다.

GCS(Global Common Society)란 ‘지구공동사회’라는 용어로, ‘인류는 하나’라는 대전제 하에 앞으로 지구는 유엔(UN)과 같은 지구협동사회, 유럽연합(EU) 같은 지역협동사회가 공존하다가 이를 모두 융합한 범세계적 지구시민사회가 등장, 결국 보편적 민주주의에 바탕을 둔 국가연합(지구공동사회)이 된다는 구상이다.

1981년 제6차 세계대학총장회의 총회에서는 ‘평화의날’ 제정을 제창해 그해 유엔 총회에서 ‘국제 평화의 날(매년 9월 셋째 주 화요일, 2001년 이후 9월 21일로 고정)’이 제정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84년에는 남양주 광릉캠퍼스에 ‘평화교육기관’인 평화복지대학원을 설립했고, 캠퍼스 내에는 ‘평화의탑’을 세웠다. 이 평화의탑에 새긴 문구가 ‘평화는 개선보다 귀하다(Peace is more precious than triumph)’였다.

조 박사가 남긴 이 문구가 WT 태권도 시범단 공연에 나타난 건 우연이 아니었다.

현직인 조정원 WT 총재가 조 박사의 장남이다. 그는 지난 2004년 고 김운용 전 IOC 위원의 뒤를 이어 WT 총재에 취임, 태권도에 내재된 평화의 철학을 재조명하는데 공을 들여왔다. 태권도와 조영식 박사의 평화론 사이에 그가 있었던 셈이다.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가 결정된 직후, 남북 태권도인들이 서울과 평양을 넘나들며 태권도 시범공연을 신속히 선보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WT가 꾸준히 북측 ITF와 교류를 이어왔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지난 2014년 8월 유스올림픽이 열린 중국 난징에서 토마스 바흐 IOC위원장이 참석한 가운데 조정원 WT 총재와 당시 ITF 총재였던 장웅 IOC 위원은 상호 인정과 존중, 다국적 시범단 구성 등을 약속한 합의의정서를 체결했다. 이를 바탕으로 ITF는 북한의 잇단 도발로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던 지난해 6월 무주 세계태권도선수대회 때도 방남해 4차례 시범공연을 진행했다.

‘평화는 개선보다 귀하다’는 문구는 ‘허울 좋은 승리보다 평화가 낫다’는 의미로 통상 해석된다. 전쟁을 벌인 양쪽에게 모두 상처뿐인 승리보다는 실질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지난달 27일 남북정상회담 사흘 후인 30일 문재인 대통령이 고 김대중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로부터 축전을 받고 “노벨 평화상을 타시라”는 덕담이 건네지자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받으셔야 한다”며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답한 사실이 화제가 됐다.

대통령의 이 발언에 ‘평화는 개선보다 귀하다’는 문구의 진수가 담겨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교롭게도 문재인 대통령은 경희대 법대 출신이다. 조영식 경희학원 이사장은 경희대 법대 입학성적우수자들에게 4년 전액장학금을 지원한 것으로 유명하다.

홍기준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는 14일 기자에게 “문 대통령이 조영식 이사장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라며 “하지만 당시 전교생을 상대로 총장의 강의가 있었다. 재학생들은 적든 크든 영향을 받지 않았겠느냐”고 말했다. 

soo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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