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우리 유치원이 비리?”… ‘마녀사냥’에 속타는 교사들
뉴스종합| 2018-10-13 13:18
-‘비리 유치원 명단’ 후폭풍
-출석부 기재 실수도 ‘비리’로 몰아세워
-박용진 “사안 경중 판단하지 않았다”
-국감마다 반복되는 국회의원 구태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교육청 감사로 적발된 ‘비리 유치원’의 명단이 공개돼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단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상당수는 비리라기엔 사소한 실수 수준입니다. 국정감사 시즌을 타 여론을 자극해 이름 한번 알려보려는 국회의원의 과욕이 애꿎은 유치원들을 범법으로 몰아가고, 유치원 교육 시스템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최근 전국 교육청들의 2014년 유치원 감사 결과 보고서를 제출받아 공개했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감사 결과’이지, 감사를 통해 지적받은 내용이 모두 ‘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박 의원은 ‘감사 결과’라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표현 대신, ‘비리 유치원’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국민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실제 명단을 구체적으로 보면 ‘비리’라기에는 황당한 내용이 많습니다. 서울 지역 적발 명단 중 제일 처음 나오는 ‘서울청계숲유치원’은 1년반 동안 우유 90개를 더 공급받아 3만4200원을 지급받고, 담임교사가 3일만 출석한 아이의 출결을 잘못 입력해 15일에 해당하는 유아학비 5만4200원을 더 지급받았다는 것이 핵심 적발 내용입니다. ‘혈세 착복’이라 보기엔 과하지 않나요?

훨씬 가벼운 적발 사항도 많습니다. 충북 청주의 ‘현대유치원’은 천재지변이나 법정감염병 감염 등의 사유로 불가피하게 결석한 아이는 출석부에 ‘출석 인정’으로 처리해야 하는데 ‘결석’으로 처리했다는 것이 적발된 내용의 전부입니다. 충북 제천의 ‘경희숲유치원’은 생활기록부 양식이 변경됐는데도 이전 양식에 따라 작성했다는 것이 적발되는 바람에 졸지에 ‘비리 유치원’ 낙인이 찍혀버렸습니다. 유치원에 대한 규제가 갑자기 늘어나고 법령이 수시로 바뀌다보니 교사들도 법령을 제대로 몰라서 적발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적발건수가 1146건이나 되는 것은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에게도 책임이 있는 겁니다.

박 의원의 비리 명단 공개로 학부모들은 분개하고 있습니다. 개별 유치원에는 학부모들의 항의 전화가 쏟아지는 통에 교사들이 해명하느라 정신 없는 상황입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는 처벌을 강화하라는 청원도 잇따르고 있습니다.

물론 적발된 사안 중에는 중대한 비리도 많습니다. 교비로 명품 핸드백, 성인용품을 사거나 개인승용차 유지비를 대는 등의 행위는 당연히 비난받아 마땅하고 합당한 처벌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적발된 1146곳 유치원 모두를 ‘비리 유치원’이라 도매금으로 매도하고 마녀사냥을 벌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법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유명한 법언 중 하나로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박 의원의 ‘비리 유치원 공개’는 과연 그러한 정신에 얼마나 충실했을까요? 혹 한 명의 범죄자를 비난하기 위해, 열 명의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몰아간 것은 아니었을까요?

박 의원은 1146곳의 적발 내용을 일일이 보면서 중대한 내용만 공개를 하면 애꿎은 유치원이 ‘비리’라 손가락질 받는 일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 정도의 시간과 노력을 들이기 어려웠다면, 교육청의 행정처분 수위에 따라서 공개할 수도 있는 거죠. 교육청은 적발 사항의 경중에 따라 ‘시정’부터 ‘중징계(정직, 해임, 파면)’까지 처분을 달리하고 있으니까요. 그 정도의 필터링을 하는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박 의원은 자신의 블로그에 오히려 당당하게 “사안의 경중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밝힙니다. 판단했어야죠.

사실 이같은 일은 해마다 이맘때 국정감사 시즌이 되면 반복됩니다. 국회의원들은 이 기간 자신의 이름 석자 한번 알리기 위해 혈안이 돼 물불을 가리지 않죠. 최근 선동렬 야구국가대표 감독을 국정감사장에 불러서 막무가내로 호통쳤던 손혜원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이 도리어 여론의 비난 역풍을 받은 일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제는 국민의 의식 수준이 높아져서 그 같은 자세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함에도, 여전히 많은 국회의원들은 시대착오적 인식에 머물러 있습니다. 사립유치원처럼 국민에게 부정적 이미지가 낙인이 찍혀버린 업종이라면 비난 여론을 선동해 몰아세우기 딱 좋은 국회의원의 먹잇감이죠.

박 의원은 이번 비리 명단 공개로 여론의 반향이 커지자 고무됐는지, 추가로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했습니다. 국정을 감시하는 의원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사안의 경중’을 판단해 공개했으면 한다는 바람이 듭니다. 특정 집단을 악마화해서 선량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소시민까지 매도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paq@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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