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사건 X-파일①] 어머니 치료비 마련하려다 한달간 14번 당해…‘그놈 목소리’에 삶이 망가졌다
뉴스종합| 2018-11-09 09:31
사진=보이스피싱범은 지난 9월 어머니의 치료비 마련을 위해 저금리 대출을 알아보던 50대 남성에게 접근했다. 이들은 피해자에게 착수금, 세금, 선이자 등 명목으로 적게는 20만원 많게는 수백만원을 받아챙겼다.
-보이스피싱에 당한 50대 남성의 절규
-대출해주겠다며 착수금ㆍ선이자 등 한달간 2400만원 보내
-“신뢰감 주는 목소리ㆍ걱정어린 말투…의심하기 어려워”
-“박 대리가 사기꾼일 줄은…이혼ㆍ실직, 삶이 파탄났다”


[헤럴드경제=정세희 기자] ‘사랑합니다! 고객님. ㅇㅇ저축은행 박진형 대리입니다. 고객님의 대출을 도와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지난 9월 13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에서 사는 윤진만(가명ㆍ52) 씨에게 저축은행 직원으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가 날라왔다. 70대 어머니의 신장 투석 치료비 마련을 위해 대출을 알아보고 있던 윤 씨에게 이는 하늘에서 내린 ‘선물’ 같았다. 윤 씨의 노모는 신장병을 앓고 있어 주기적으로 투석을 해야만 했다. 투석비용은 경비일을 하며 한달 200만원을 버는 윤 씨에게 너무 버거운 돈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8년째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던 장모의 병이 악화돼 수술을 해야만 했다. 당장 시중 은행에서 대출을 받으려고 했지만 은행의 문은 높았다. 결국 그는 인터넷에서 ‘서민대출‘, ‘햇살론’ 등을 알아봤다. 고민 끝에 5% 저금리로 대출을 해주겠다는 한 저축은행에 전화해 1500만원 정도를 대출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대출이 가능한지 알아보겠다던 담당자가 드디어 연락을 해온 것이다.

그는 어머니의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뿐이었다. 5%의 이자가 부담이 됐지만 성실하게 일해서 갚아나가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절박한 사연을 듣고서 어떻게든 대출을 도와주겠다는 고마운 박 대리가 보이스피싱 사기꾼인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저축은행 대리를 가장한 보이스피싱범과 피해자가 카카오톡으로 나눈 대화를 재구성했다. 보이스피싱범은 불안해 하는 피해자에게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재촉하는 한편, ‘자신도 일이 잘돼야 회사에서 잘리지 않는다’며 안심시켰다.
착수금, 선이자, 재산세…조금씩 돈 요구= 저축은행 박 대리는 대출을 해주겠다면서 윤 씨의 직장여부, 수입 정도 등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러고선 “어렵긴 하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다”며 먼저 대출 착수금 20만원을 요구했다. 대출 수수료인가보다 라고 생각한 윤 씨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이를 입금했다. 그런데 박 대리는 “서류가 미비해 심사가 어려울 것 같다”면서 100만원을 더 보내라고 했다. 나중에 대출이 통과되면 해당 금액을 10원 하나도 빼먹지 않고 모두 돌려줄 것이라고도 했다. ‘그저 대출을 받아서 어머니 치료비만 구할 수 있다면…’ 윤 씨는 두번째 입금을 했다.

하지만 돈 요구는 계속됐다. 이유도 다양했다. 업체는 윤 씨의 통장에 거래 내역이 없다며 “1500만원의 6개월치 대출 이자 173만원을 먼저 보내 달다”고 지시했다. ‘이자는 어차피 갚아야 되는 돈’이라는 생각에 윤 씨는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입금했다.

요구 금액은 점점 커졌다. 9월 20일 오후 박 대리는 “대출 작업을 하던 중 통신비 연체 기록이 발견됐다”며 다급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고객님! 통신비 연체 사실에 대해 왜 미리 알려주지 않으셨어요? 금감원에서 조사를 나오면 우리 회사나 당신이나 벌금을 내야합니다.”

말도 안되는 얘기였다. 통신비가 연체 된 적이 한번도 없었던 윤 씨는 “그럴 리가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나 박 대리는 “금감원에서 조사가 나오면 고객님의 직장에서도 알게 될 것”이라면서 “우리는 법무팀이 있어서 해결할 수 있는데 당신은 신용불량자로 찍혀 직장에서도 잘리게 될 것”이라고 강하게 나왔다. 순간 윤 씨는 대출을 못 받게 되는 건가 겁이 났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말이 절로 나왔다.

박 대리는 선심을 쓰듯 “600만원을 내면 해결해주겠다”고 말했다. 물론 보내주는 돈은 대출 작업이 완료되면 모두 돌려주겠다고 안심시켰다. 하지만 윤 씨는 수중에 갖고 있는 돈이 전혀 없었다. “더 이상 돈이 없다”고 하자 박 대리는 “그럼 내가 200만원은 구해볼 테니 400만원이라도 구해오라”고 말했다. 다시 윤 씨는 지인 여러명에게 돈을 빌려 넘겼다. 이후에도 저축은행 측은 서류상 문제가 생겼다, 재산세를 내야한다는 등 갖가지 이유로 수차례 돈을 요구했다. 윤 씨는 “이렇게 돈을 내면서까지 대출을 받아야 하나 싶었지만 어차피 돌려받을 것이라고 믿었고, 이미 몇백만 원을 입금한 상황에선 그저 넣은 돈이 아까워서라도 대출금을 꼭 받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들은 그를 다른 보이스피싱에 이용하기까지 했다. 박 대리는 대출에 필요하다며 체크 카드 한도를 높인 뒤 카드를 소포로 보내달라고 요구했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윤 씨의 통장과 카드는 다른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돈을 입금하는 ‘대포통장’으로 쓰였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당하는 동시에 보이스피싱 가담자가 된 것이다. 

피해자 윤 모씨가 지난 한달간 보이스피싱범에게 속아 입금한 내역서. 14차례에 걸쳐 총 2406만원을 입금했다. [서울 서대문경찰서 제공]
신뢰감 주는 목소리, 걱정 어린 말투…“의심하기 어려웠다”= 보이스피싱 조직은 윤 씨의 불안하고 절박한 심리를 쥐락펴락했다. 윤 씨가 의심하는 징조를 보이면 박 대리는 “거의 다 왔는데 포기하겠느냐”며 그를 달랬다. 또 박 대리는 윤 씨와 자신이 ‘운명 공동체’ 임을 강조했다. ‘당신이 대출을 성공적으로 받아야만 나의 실적이 오르고 그래야만 진급을 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감정적인 호소도 가미했다. 박 대리는 피해자에게 “아내와 사이가 안 좋은데 진급을 못하면 이혼을 할 수도 있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다가도 “당신이 입금하라는 계좌가 아닌 다른 계좌에 보내서 대출이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라며 다그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다 ‘쇼’였다. 하지만 너무나 그럴 듯했다. 의심이 들어서 전화를 하면 박 대리는 전화를 곧바로 받았고 침착하고 다정하게 응대했다. 중국 조선족처럼 한국말이 어눌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중저음 목소리에 발음도 분명했다. 내뱉는 말은 청산유수였고 전문용어를 쓰면서 신뢰를 줬다. 중간중간 윤 씨를 위로하고 걱정하며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윤 씨는 10월 8일 대포통장으로 보이는 계좌에 입금한 것 같다는 은행의 연락을 받고서야 보이스피싱에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달 간 14번 총 2000만원 가량을 보낸 후였다.

이혼, 실직, 빚더미…보이스피싱 이후 삶은 파탄났다= 윤 씨는 형편이 어려웠지만 시장, 마트, 모텔 등 가리지 않고 일해온 성실한 가장이었다. 현재 그의 삶은 산산조각이 났다. 순식간에 수천 만원의 빚이 생겼고 모든 통장과 카드가 지급 정지가 됐다. 돈을 빌린 지인들은 아직도 밤마다 재촉 전화를 한다.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평소 아내와 사이가 좋진 않았지만 이번 일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직장에서도 잘릴 위기에 처했다. 현재 경비 일을 하고 있는 윤 씨는 오는 12월 재계약을 앞두고 있는데 계약시 필수적으로 확인하는 요소가 신용불량과 범죄 여부다. 그는 이번 일로 신용불량자가 됐을 뿐만 아니라 보이스피싱범에게 보낸 체크카드와 통장이 범죄에 연루돼 전자금융거래법을 위반한 피의자가 됐다. 그는 “회사에서 이를 알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라며 막막해했다.

보이스피싱에 대해서 모르고 있던 게 아니었다. 그는 보이스피싱 뉴스를 볼 때마다 ‘왜 저렇게 당하는가’ 남의 일처럼 생각하곤 했다. 윤 씨는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쉽게 현혹됐고 어느 정도 돈을 보내고 나니 보낸 게 아까워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았다”면서 “절박한 상황이 되니 뭔가에 홀린 것처럼 속아 넘어갔다”고 허탈해했다.

현재 이 사건은 서울 서대문경찰서에서 수사하고 있다. 이미 피해자가 돈을 보낸 모든 계좌는 돈이 빠져나간 상태고 보이스피싱 조직이 사용한 휴대전화는 대포폰인 것으로 확인돼 추적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를 잡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보이스피싱은 센터가 중국에 있어 검거가 더욱 어렵다. 금융기관을 사칭한 이들에게는 절대 돈을 보내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say@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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