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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이거 왜 일해(日海)
뉴스종합| 2019-03-13 11:14
우리가 틀렸다. 그는 ‘이거 왜 일해’라 했다. 자신의 호(號) ‘일해(日海)’를 말했을 뿐이다. 자신의 호를 딴 경남 합천의 ‘일해(日海) 공원’에 방문자가 급감하자 다수 카메라 앞에서 공원 홍보를 했을 개연성도 있다. 해당 장면은 모든 방송사가 생중계 했다. 다음날 조간 1면 제목 다수에서도 “이거 왜 이래”가 확인된다. 홍보 효과를 액수로 환산하면 못해도 수백억원대다.

세간에선 그가 ‘사과의 기회를 걷어찼다’고 평했다. 틀린 분석이다. 사과에는 순서가 있다. 자기 반성이 먼저고 타인에 미안함을 표현하는 사과는 그 다음이다. 그에게 반성은 애당초 없었다. 반성이 없는데 사과를 구하다니. 그의 사과를 기대했던 것은 애초 불가능했다. 그는 알츠하이머다. 그러니 광주 법정 출석 당시 그의 곁에 꼭 붙어섰던 여사의 말에서 그의 정신 상태를 읽어보자.

여사는 ‘전두환은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했다. 여사는 살고있는 집이 경매에 붙여지자 ‘이 집은 내 집’이라 했다. 여사는 회고록에선 ‘우리도 5ㆍ18의 희생자’, ‘우리는 광주와 무관하다’ 썼다. 2013년 집을 압류 당했을 때엔 ‘극단적 선택’을 고심키도 했다고 한다. 알츠하이머인 그와 여사의 관계는 ‘신뢰관계인’이다. 두 사람은 법정에서도 함께였다. 그가 꼭 붙잡은 여사의 손은 그와 여사의 생각이 대동소이 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미뤄 짐작컨대 그는 자신에 대해 “광주와 무관한 5ㆍ18 희생자인 나는 민주주의의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기억은 진실보다는 해석에 가깝다. 성공한 쿠데타 12ㆍ12의 주역은 그렇게 민주주의의 아버지가 됐다. 혹여라도 ‘그는 정말로 자신이 민주주의의 아버지라 믿을까?’라는 의혹은 품지 말자. “이거 왜 이래”란 그의 역정은 당당했다. 자세의 당당함은 이미 그의 ‘정신 승리’가 완결됐음을 증명한다.

그의 ‘반성 없음’만을 탓하기도 어렵다. 그의 반성 가능성을 차단하는 무리 탓이다. 여전히 한국 사회 일부에선 그를 ‘전땅크 장군’이라 추앙하고, 일부 야구팬은 그가 프로야구를 도입했다는 점을 들어 그를 ‘엔두(엔젤두환)’라 부른다. 지도자의 인격은 국가 역사에 투사된다. 오늘 감옥에 갇혀 있는 한 대통령을 사모 하는 세력도, 잠시 간이석방된 전직 대통령에 대해 애잔함을 표하는 이들도 있다. 반성없음의 역사는 오늘도 진행형이다.

바뀔 것은 없으니 뭐라도 배우자. 제안하는 것은 그들의 ‘뻔뻔함’이다. 요약하면 생명존중 사상쯤이다. 누가 내 지갑을 열어보면 당당하게 ‘29만원 뿐’이라 답하고, 집이 추징돼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이 집은 내 집’이라고 주장하자. 뇌물 받았던 사실이 드러나면 ‘정치 탄압’을 주장하며 당당하게 감옥에서 살고, ‘발포 명령 부인하냐’고 누가 물으면 “이거 왜 이래”라며 역정을 내자. 올해로 89세인 그의 장수는 흠결없는 ‘정신 승리’의 결과물이다. 그 바탕엔 ‘뻔뻔함’이 자리한다.

‘나는 깨끗해야 한다’는 청렴은 생명존중 사상에 반한다. 반성과 성찰은 자기 학대와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반성은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 이에 비해 뻔뻔함은 그들이 살아남을 근간이 된다. 스스로 죽지 말고 살아남자. 역사에 내 삶이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는 남의 일로 두자. 반성 보다는 뻔뻔이란 단어에 더 눈길이 가는 오늘이다. 

홍석희 사회섹션 사회팀장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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