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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 이사람] 과학자를 꿈꿨던 판사, 블록체인에 빠져들다
뉴스종합| 2019-04-03 09:30
-블록체인법학회 초대 회장 이정엽 의정부지법 부장판사
-“법률은 컴퓨터 코드, 법조인은 버그 잡는 코더”
-주식도 ‘도박’이지만 제도 통해 안착…신기술 성장 가능성 지워선 안돼


[사진=정희조 기자/checho@heraldcorp.com]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사회발전의 기본에는 과학기술이 있다고 봐요. 블록체인으로 사회 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자 또는 컴퓨터공학자의 말이 아니다. 의정부지법 이정엽(48·사법연수원 31기) 부장판사는 블록체인을 ‘암호화폐’로 대변되는 수익성 뿐만 아니라 사회 현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블록체인법학회’ 초대 학회장을 맡고 있다.

“블록체인은 르네상스나 모더니즘, 산업혁명과 같은 정신 사조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기술이 지금 당장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부나 권력을 분산시키고 수평적 조직을 추구한다는 사회적 욕구에 있으니까요.”

그가 처음 블록체인을 접하게 된 것은 2015년이다. 한 지인이 책 ‘넥스트 머니 비트코인’을 건네줬다. 이 부장판사는 “처음엔 비트코인이 포인트인가, 도토리(싸이월드)인가, 뭔지 아리송해 그냥 접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곧 블록체인과 암호화폐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사법연수원에 있을 때 네이버나 다음 포털이 막 성장할 때였습니다. 돌이켜보니 이 포털들이 사회를 엄청 크게 변화시켰어요. 왜 그 당시에 네이버의 지금 모습을 상상해보지 못했을까, 그랬다면 진로도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도 몇 십 년 후를 상상해 긍정적으로 봅니다.”

연구를 하니, 주변 사람들에게서 비트코인 투자 질문도 많이 받는다. “자본시장법을 보면 ‘이 법에 의한 경우에는 주식이나 채권 등 투자상품에 대해 형법상 도박죄를 적용하지 아니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주식이나 채권도 일단은 도박이라는 거에요. 도박성이 있는데, 법적으로 잘 제어했으니까 도박죄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주식시장도 투기성이 짙은 단계를 거쳐 정착됐기에,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도 무조건 금지해 성장가능성을 지워서는 안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부장판사는 법학을 전공하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땐 과학자가 되고 싶었다. 대학 진학을 고민할 때 ‘브이(V)’라는 외계인이 나오는 외화가 인기를 끌고 바이오 붐이 일었다. 그는 연세대 생화학과에 들어갔지만, 2학년이 돼 실험실에 들어간 뒤에야 적성과 맞지 않다고 느꼈다. 자퇴하고 다시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니 IMF 금융사태가 왔다. 늦은 나이에, 불안감이 컸던 그는 사법시험을 택했고, 판사가 됐다. 앞일은 예측하기 힘들다. 미리 대비하지 않으면 법률가로서 적절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없다. 그는 “소위 말하는 법정화폐가 100년, 200년 뒤에는 없어질 수도 있다”며 “그 전까지는 실질적인 법정화폐가 필요하고, 그 변환을 위해서 거래소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첫 코더(coder)는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이고, 법관은 버그를 잡아내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는 사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부장판사는 블록체인 문제를 조직 내에서 합의를 통해 개선하는 이념으로도 받아들인다. 그가 속한 ‘대등 재판부’는 부장판사가 배석판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판사들이 각자 판결문도 작성하고 재판 주재까지 맡는다. 학회 운영도 수평적인 ‘네트워크형’ 조직을 지향한다. 회원 개개인이 원하는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동료들과 협업해 성과물을 만들고 상호평가한다. 블록체인법학회 홈페이지에는 ‘조직도’나 ‘학회장 인사말’도 걸려 있지 않다. “블록체인은 ‘사회적 기술’입니다. 기술을 가진 분들과 법률가가 협업해야만 꽃피울 수 있는 분야죠. 법조인들이 블록체인 제도를 디자인하고, 제도 문제점을 사전에 검수하는 학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think@heraldcorp.com

이정엽 부장판사는 △대기고, 서울대 철학과 △사법연수원 31기 △서울중앙지법 판사 △서울고법 판사 △대전지법 부장판사 △의정부지법 부장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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