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
오늘부터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심한 ‘을질’(○) 낮은 고과(×)
뉴스종합| 2019-07-16 11:45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첫날인 16일 MBC 계약직 아나운서들이 서울 중구 서울고용청에 해당 법안에 근거한 진정서를 제출하고 있다. 해당 법안 관련 첫 진정서 제출이 될 것으로 보인다. [연합]

[헤럴드경제=신상윤 기자]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개정 근로기준법(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16일 시행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직장 내 괴롭힘’이 당장 처벌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 직장 내 괴롭힘 예방, 징계 등을 위한 시스템을 갖추도록 해 직장 내 괴롭힘을 근절하는데 이 법의 목적이 있다고 고용노동부는 설명했다.

▶처벌 규정 없어…“예방·징계 시스템 확립 유도”=이날 노동부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 또는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이 법안은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고 있지만, 직접적인 처벌 규정을 두고 있지는 않다. 다만, 상시 노동자 10인 이상 사업장은 취업규칙에 직장 내 괴롭힘 예방, 징계 등의 내용을 포함하도록 의무화했다.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처벌보다는 기업별로 직장 내 괴롭힘 근절을 위한 체계를 갖추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해당 취업규칙에는 ▷금지 대상 괴롭힘 행위 ▷예방 교육 ▷사건 처리 절차 ▷피해자 보호 조치 ▷가해자 제재 ▷재발 방지 조치 등이 기재돼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에 대한 징계 규정을 신설할 때에는 노동 조건의 불이익 변경에 해당해 노동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사용자는 직장 내 괴롭힘이 발생했다는 신고를 접수하거나 사건을 인지했을 때 지체 없이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에 착수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에 대해서는 유급휴가 명령 같은 보호 조치를 해야 한다. 괴롭힘이 사실로 확인되면 가해자에 대해 징계와 근무 장소 변경과 같은 조치를 해야 한다.

사용자가 직장 내 괴롭힘 신고자나 피해자에게 해고를 포함한 불이익을 주면 안 된다. 이를 위반하면 3년 이하 징역이나 3천만원 이하 벌금 부과 대상이다. 직장 내 괴롭힘에 따른 업무상 스트레스가 원인인 질병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하는 개정 산업재해보상보험법도 이날부터 시행된다. 직장 내 괴롭힘에 따른 질병이 산업재해로 인정된다는 얘기다.

직장 내 괴롭힘을 법으로 금지한 나라는 프랑스와 호주 등 소수에 불과하다. 일본도 직장 내 괴롭힘 예방을 위한 행정 지침만 두고 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를 명문화한 이 법안은 병원 내 신임 간호사에 대한 ‘태움’ 관행 등 직장 내 괴롭힘 사건이 잇달아 불거지면서 논란을 일으킨 것이 계기가 됐다. 이 법이 직장 내 괴롭힘은 잘못이라는 인식을 자리잡게 해 해당 행위 근절을 위한 첫걸음이 될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개념 모호해 혼란 불가피…“일률적 기준 없어”=직장 내 괴롭힘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어떤 행위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지를 두고 초기에는 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려면 직장 내 지위를 포함해 관계상 우위를 이용한 행위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관계상 우위는 나이, 학벌, 성별, 출신, 근속연수, 전문 지식, 노동조합 가입 여부, 정규직 여부 등 다양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나이의 많고 적음이 직장 내 괴롭힘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선배의 ‘갑질’뿐 아니라 후배의 ‘을질’도 직장 내 괴롭힘에 포함될 수 있다. 예컨대 후배인 인사 업무 담당자가 선배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는 등 괴롭힌다면 직장 내 괴롭힘이 될 수 있다. 직급이나 근속 연수가 낮거나 짧아도, 학벌 등 인적 속성이나 인사 등 직장 내 업무 영향력을 고려해 관계의 우위에 있다면 후배도 가해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 되는 행위가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야 한다. 가령 반복적으로 심부름을 시키는 등 인간관계상 용인할 수 있는 부탁의 수준을 넘어 사적 지시를 하면 직장 내 괴롭힘이 될 수 있다. 이 밖에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상사가 ‘면벽 근무(홀로 벽을 보고 있어야 하는 위치에 배치돼 근무)’를 지시할 경우 노동자가 정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기에 적절한 환경이 아닌 것으로 인정되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할 수 있다.

앞서 노동부는 지난 2월 직장 내 괴롭힘의 개념을 두고 산업 현장에서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고 보고 구체적인 사례를 담은 매뉴얼을 내놓았다. 매뉴얼을 보면 회사 임원이 육아휴직을 쓰고 복직한 직원에게 기존 업무와는 다른 업무를 맡기고 다른 직원들에게 그를 따돌리라는 지시를 해 피해자가 우울증을 앓게 했다면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 회사에서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은 지시로 정신적 피해를 줬기 때문이다.

회식도 직장 내 괴롭힘의 대표 사례로 자주 언급된다.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회식 참석을 강요했을 때 ▷술자리를 만들라고 반복적으로 요구하며 “인사상 불이익을 주겠다”고 경고했을 때 ▷회식 자리에 늦었다고 다량의 술을 강제로 권유할 때 ▷따돌림 수준으로 식사 자리에서 배제할 때 직장 내 괴롭힘으로 볼 수 있다.

애매한 부분은 업무상 적정 범위에 해당하는지 여부다. 예컨대 부하 직원의 미흡한 업무 처리로 인해 상사가 보완 지시를 반복해서 내렸고, 이로 인해 부하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면 업무상 적정 범위에 해당할 수 있어 여러 정황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예를 들어 의류회사 디자인팀장이 신상품 발표 행사를 앞두고 팀원에게 디자인 보고를 시켜놓고는 미흡하다며 계속 보완을 지시해 팀원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해도 직장 내 괴롭힘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팀장의 지시가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섰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인사상 불이익도 마찬가지로 직장 내 괴롭힘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승진을 위해 A등급 고과를 필요로 하지만 이를 오랜 기간 받아오지 못한 직원이 문제 제기를 할 때, ‘낮은 고과’가 의도된 괴롭힘이라고 볼 수 있는 다른 사실관계가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 직장 내 괴롭힘의 기준은 일률적으로 제시하기는 어렵고 구체적인 사정을 최대한 참작해 판단해야 한다고 노동부는 설명했다.

ke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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